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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ita Nov 12. 2016

삶이 견딜 수 없을 때 항상 자코파네가 있다

#53. 폴란드 자코파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밝혀주는

노랗게 물든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옆엔 나와 발걸음을 맞춰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함께였으면 더 좋겠다.     

호텔 계단에 서서 바라보니

밖은 이미 온통 하얀 눈밭이 되어있었다.

노란 불빛으로 물든 눈길은

그렇게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길 손짓하고 있었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가지 않을 이유가 말이다.     


의미 없는 우산을 하나 집어 들고는

곧장 밖으로 나간다.

영하라는 무서운 날씨 속에서도

거리에 수북이 쌓여있는 눈과

늦은 밤까지도 한없이 내리는 눈발은

계속해서 나를 걷게 하기에 충분했다.     

-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다.

보드랍게 쌓인 눈을 꾹꾹 다지며

발걸음을 하나둘 떼고 나면

하얀 거리 위엔 내 발자국 살며시 새겨진다.     


내가 걸어온 길,

눈은 또다시 그 위를 덮는다.

마치 한 번도 이 길을

걸은 적이 없는 것처럼.

선명했던 발자국은 다시 희미해져간다. 

10월에 내리는 예기치 못한 폭설을 맞았다.

그 낯설고 어색한 순간이 좋다.

누군 몰래 두고 간 선물 같아

그저 설레고 행복하기만 하다.     


누구보다 먼저

새하얀 겨울의 낭만맛본 기분이랄까.

달콤한 크리스마스가

나에게만 조금 더 빨리 찾아온 것 같다.

자코파네에 밤이 내려앉는다.

노란 가로등 밑으로 몇몇 가게에선

따뜻한 모닥불을 지피고 있다.

- 타닥타닥

코 끝에 감도는 나무 타는 냄새가 참 좋다.     


눈발이 다시 조금 굵어지자 잠시 어딘가에 앉아

눈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히 들어간 가게 안에서는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기름기가 쫙 빠진 담백한 바베큐를 구워내고 있다.


립스테이크 하나에 맥주를 시켜놓

넓은 창밖으로 자코파네의 밤을 바라본다.

가로등 불빛에 어울리는 건

토록 하얀 눈이었을까.

까맣게 어두운 밤하늘에 어울리는 건

이토록 하얀 눈이었을까.


따뜻한 난로를 등에 놓고 바라보는 눈송이들은

또 얼마나 달콤한가.

삶이 견딜 수 없을 때
항상 자코파네가 있다.

- 폴란드 자코파네 속담


 한마디에 나는

자코파네에 와야겠다다짐했다.

영혼의 안식처라 불리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내 두 발로 걸어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도착한 자코파네는

소리 없이 하얀 눈을 내리며 나를 맞아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놓던 첫 발걸음에

아니, 버스 창가에 비추던 자코파네를 본 순간부터

이미 내 영혼은 

자코파네에 기대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견딜 수 없어진 시간들을

아무런 말없이 받아준 자코파네.

차곡차곡 쌓여가는 눈송이들이

지친 무언가를 괜찮다며 토닥인다.     

쉬지 않고 내리는 눈이 그대로 놓인

집 앞의 고요한 공원.


아무도 보지 않는 이곳.

아무도 걷지 않는 이곳.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 이곳.     

이럴 때면 괜스레 무언가를 꺼내놓고 싶어 진다.


    답답했던 마음일 수도,

   지쳤던 시간일 수도,

했던 지난 일상의 한 시점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한참을 그곳에서

걷기도, 뛰기도, 가만히 서기도 하며

지쳐있는 날 위로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선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당연히 글도 읽을 수가 없다.

무뚝뚝한 폴란드어가 오고가고

무심하리만치 담담한 표정만이 지나갈 뿐이다.


그 사이에서 특별한 것 없는

뜨거운 진심을 주고 받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굳이 꺼내려하지 않아도

보여야 할 것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이곳이 좋다.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억지로 말하려 하지 않아도

그냥 지금 그대로 괜찮다고 다독

무심히 건네주는 그 손이 고맙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는지

아무 말없이 한참동안 쌓여가는 눈을 보고 있으니

어쩌면 오늘 밤엔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갈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말도 안 되는 철없는 생각도

이곳에서만큼은 흠이 되지 않는다.

정말 산타가 다녀갈지도 모르니까.     

새하얗게 펼쳐진 눈밭이,

감싸 안 듯 내리는 포근한 눈송이들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건넨다. 

  

자코파네라서 다행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삶이 견딜 수 없을 땐

항상 자코파네가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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