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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ita Dec 30. 2016

정렬의 플라멩고에 사로잡히다

#71. 스페인 세비야

나른한 시에스타가 끝났다.

어느새 스페인의 여유를 담아내는 시에스타가

내 일상처럼 몸에 배어버린 것만 같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시계는 3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다가 문득

오늘 점심은 나가서 먹겠다고 다짐을 해놓고는

마땅한 식당 하나 찾아 놓은 게 없었다.

부랴부랴 알아보니 집 바로 근처에

스페인에서 뿐 아니라 한국인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유명한 맛집이 있단다.


그런데 아뿔싸.

시에스타로 4시부터 브레이크 타임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30분.

아무래도 뛰어야겠다.


일어나자마자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곧장 타파스 집으로 향했다.     

동네 타파스 집인 줄 알았건만

이미 가게 안엔 북적이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는 데다 대기석까지 기다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과연 지금 들어가도 먹을 수나 있을는지 불안감이 몰려왔다.     

어찌해야 하나 기웃거리던 찰나 익숙한 한국말이 귓가에 스친다.

한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는 직원분이 해맑은 미소를 띤 채 다가오더니 뚝딱 자리 하나를 내어주신다.


그 덕에 별 어려움 없이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한잔 시켜두고 본격적으로 타파스를 즐긴다.


먼저 향긋한 바다 냄새가 기분 좋은 구운 오징어 요리로 입맛을 돋우고,

그 다음 짭조름한 소스가 곁들여진 고소한 참치 타다로 풍미를 더한다.

세 번째 요리로 나온 야들야들한 소고기 구이는

더 이상 그 어떤 필요 없다.


이렇게 끝나기엔 아쉬워 노릇노릇 오동통한 관자가 얹어진 크림 무스로 입 안을 부드럽게 가득 채우고,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선 절대 배신하지 않는 고소한 문어구이를 먹어주면 완벽한 해산물 파티가 마무리된다.

그 사이 와인잔은 계속해서 채워지고 있었다.


장장 2시간 동안 이어진 식사는

터질듯한 배와 벌겋게 달아오른 기분 좋은 취기를 안고서야 끝이 났다.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구름이 피어있는 하늘은 반짝였고,

해가 저물어가는 세비야의 바람을 느끼며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세비야에 저녁이 다가오면

거리 곳곳은 뿌연 연기로 가득 찬다.

그 연기가 하늘 높이까지 올라가

웬만한 거리는 온통 하얀 연기로 자욱하다.    

 

그 연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고소한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그토록 진한 연기의 정체는 다름아닌 군밤이다.


바람이 부는 저녁이 되면 너나할 것없이 고소한 군밤 냄새를 따라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춥고 쌀쌀한 날에 군밤이 떠오르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스페인에서 군밤이라니.

괜스레 따뜻하고 익숙한 풍경이 겹쳐지며 웃음이 새어 나온다.    

 

역시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하며

뜨거운 군밤 한 봉지를 사서는

손가락이 거뭇해질 정도로 까먹고 다시 거리를 걷는다.

벌써부터 거리 곳곳에 놓여있는 테라스에는

맥주 한잔을 곁들이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이

흥이 많은 젊은 친구들이건 

세비야의 하루는 낮부터 밤까지 뜨겁

불타오른다.     

골목골목 걸으며 10분쯤 지나자

미리 예약해 둔 플라멩고 공연장 입구가 보인다.


앞자리에서 봐야 무용수의 표정까지 함께 볼 수 있다기에 조금 서둘러 40분 전에 도착한 터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생각보다 작은 무대 주의로 자리가 빼곡하게 만들어져 있고,

그 옆엔 간단한 술과 음료를 즐길 수 있는 바가 마련되어 있다.   

  

공연 시작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은 터라

바에 들러 샹그리아 한 잔을 주문한다.

커다란 얼음 하나에 과일 몇 조각이 띄워진 샹그리아는 언제나 기분 좋은 달콤함을 선물해준다.     

얼추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홀짝홀짝 마시던 샹그리아가 비워질 때쯤,

조심스레 공연의 막이 오른다.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흐르고

굵직한 노랫소리가 올라가고

손뼉이 마주치는 소리가 더해지자

드디어 정렬의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씌인 것처럼

간절한 표정과,

애원하는 듯한 손짓,

끝없이 질주하는 춤과

흩날리는 땀방울까지.     


플라멩고의 모든 것에서 짙은 애환과 집착

환희와 간절한 사랑이 섬세하고 그려지고 있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무용수들의 표정은

그 어떤 춤과 노래보다 더 간절하고 애틋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에선 무언가를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었으리라.

한 맺힌 그들의 포효였으리라.

끝없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으리라.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템포를 따라

잔잔하게 드러나는 섬세한 표현을 이어가다가도,

손뼉이 마주치는 소리와 발을 구르는 소리가

기타 선율에 맞춰 점점 격정적으로 더해지면

그들의 짙은 표정을 담은 춤사위는 기어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숨이 멎을 듯한 공연에 넋을 놓고 바라보다보니 순식간에 1시간의 공연이 끝이 났다.

그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든 아름다운 공연에 끝없는 박수를 보낸다.


공연장 밖으로 나와서도 쉽사리 여운이 가시질 않는지, 나는 계속해서 짧은 감탄을 내뱉으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붙잡아야만 했다.    

 

단순하지만 가볍지 않은 멜로디의 거친 노랫소리,

죽을 것처럼 애원하던 그들의 간절한 표정과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쏟아내며 구르던 발소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눈앞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험난한 역사를 가지고 살아야만 했던 집시들의 애달픈 한과 집착,

그리고 짙게 깔린 간절한 애원을 담은 플라멩고는

감히 단순한 춤과 노래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목소리이자

그들의 역사이고

그들이 남겨놓은 진실된 얼굴일 테니 말이다.

강렬했던 플라멩고의 노랫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깊고 진한 플라멩고의 매력에 뒤엉켜

집으로 향하는 밤.


나는 한없이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짙은 세비야의 까만 밤하늘만이

말없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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