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하늘로 물드는 이 밤

#07. 그리스 산토리니 이아마을

by bonita


이런 여행을 의도한 게 아니었건만,

그리스에서 시작한 배낭여행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리를 잡자마자 또다시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하다보니

이젠 배낭을 풀고 다시 싸는 것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터였다.


꾸역꾸역 산토리니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몸도 마음도 이미 천근만근 무거워진 상태에서 생애 처음 타는 페리에 긴장한 탓도 있을까.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내려놓기 무섭게 잠이 들어 버렸다.

일어나 보니 저녁 7시.


기껏해야 이곳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곤 하루가 전부였음에도

나는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놓쳐버린 셈이었다.

순간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 솟구쳤다.


힘들게 찾아온 산토리니는 왜이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달리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은지.

이렇게 꾸역꾸역 이곳을 둘러본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IMG_3928.JPG
IMG_3944.JPG


더 늦기 전에, 여행의 시작이 얼마 되지 않은 이 시점에서 분명 새로운 전환점을 맞아야만 했다.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여행의 그림을 맞춰놓지 못하면 이어지는 여행에서도

누굴 위한 여행인지 모를 힘들고 고단한 시간들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올 터였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욕심을 내려놓기로 다짐했다.

지금 당장 이런 생각을 하느라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불안하고 화가나고 속상하고 답답하지만 지금 하루라는 이 시간에서조차 욕심을 놓지 못하면

앞으로의 여행은 불 보듯 뻔했다.


지독한 욕심으로 얼룩진 여행에서

내가 보고싶었던 나를, 하루를, 그 시간을 찾는다는 건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름휴가 성수기에 주말까지 겹친 토요일에 저녁 7시라는 시간은

사람으로 붐비는 이아마을을 피하기엔 딱 좋은 시간이었다.

시간도 꽤나 늦은데다가 그마저도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기에

숙소 앞 근처에서 차를 빌려 이아마을로 향했다.


IMG_1760.JPG


이아마을로 가는 길은 속상함으로 얼룩졌던 작은 마음을 살며시 달래주었다.

굽이굽이 가파른 절벽들이 하늘 가득 물들인 붉은 노을과 만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랠리를 연상시키는 듯한 가파른 절벽들,

그리고 그 밑에 찬란하게 펼쳐진 산토리니의 푸른 바다.


산토리니에 다시 온다면

그건 아마 굽이 치는 절벽을 세차게 내달리며 내려다보는 기막힌 광경을

또다시 눈에 담기 위함일 것이다.


이 장관을 혼자 보기 아까워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아무리 셔터를 눌러대도 카메라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이 색감과 이 바람과 이 분위기는 그 어떤 사진에서도 그려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내 두눈을 크게 키웠다.

언제 또 다시 이 순간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기어코 평생을 잊지 못할 것처럼 두 눈에 꼭꼭 채워두었다.


20여 분간을 더 달려 이아마을의 선셋 포인트로 향했다.

산토리니의 날씨는 8월이라는 계절을 무색하게 할 만큼 거센 바람을 동반했다.

세차게 부는 차가운 바람에 맞서며 드디어 붉은 해가 고개를 내민 해변 앞에 다다랐다.


IMG_3947.JPG


해가 지는 산토리니의 하늘은 핑크빛으로 한 가득 물들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핑크 빛이 온 하늘을 덮고 있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붉은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 옆에 기대어 천천히 저물어가는 저녁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빛깔을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지금 이토록 사랑스러운 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까.

기어코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핑크빛으로 물든 하늘처럼 어느새 내 가슴에도 발그레한 핑크빛이 새어들었다.


저녁에 바라보는 이아마을은 하늘과 바다 그리고

곳곳에 켜진 반짝이는 조명이 어우러져 눈부신 야경을 선물해 주었다.

비록 티끌 하나 없는 맑고 새하얀 색감으로 물든 마을 사이로

영롱한 푸른빛이 상쾌함을 더하는 이아마을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수줍은 듯 붉게 밝힌 어린아이의 두 뺨처럼

사랑스러운 핑크빛 하늘 아래 살며시 고개를 내민 새하얀 이아마을은

내가 만날 수 있었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리라고 단연코 말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IMG_4001.JPG


누구에게나 완벽한 인생은 없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여행이란 없다.


불완전하고 불안하고 완벽할 수 없는 순간들이 모인 것이 곧 여행이 아닐까.

모자라고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시간일지라도

결코 우린 그 시간을 여행이 아니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럴싸하게 다듬어지지 못한 시간조차도 우리에겐 잊을 수없는 여행이 되었으니 말이다.


여행은 곧 불완전한 순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린 틀에 짜인 정답에서 벗어나

투박하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약간은 쌀쌀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밤,

그 무엇이 더 아름답다 말할 수 없을만큼 눈부신 산토리니와 마주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고요하게 반짝이는 산토리니의 밤을 바라본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오늘 밤,

산토리니의 밤은 낮보다 더욱 눈부시고 아름답다.




브런치네임카드.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