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그리스 산토리니 페리
산토리니에서 다시 아테네로 향하는 날.
페리 출발시간에 맞추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러 배낭을 챙겨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출발 30분 전이 되어도 버스는 내려오질 않았다.
다행히 택시를 잡고 내려왔건만 눈 앞엔 믿을 수 없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한 바람으로 인해 섬 밖으로 나가는 모든 페리가 전부 끊겨버린 것이다.
당황한 마음에 미리 표를 끊어두었던 페리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이미 페리 결항 문의로 사람들이 바글거려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갑자기 배가 끊기다니.
갑자기 멈춰버린 머릿속에 눈앞이 아찔해져 버렸다.
이후에 알바니아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해두었던 버스와 숙소,
그리고 모든 계획들이 다 뒤엉켜버렸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나온 다른 여행자들과 정보를 모은 결과,
다행히도 밤 11시 페리 티켓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시간은 이제 겨우 점심을 가리키는 12시 30분.
앞으로도 장장 11시간을 버텨내야만 했다.
슬슬 배도 고파오고 이것저것 바꿔야 할 계획 투성인데
배낭과 짐들에 발이 묶여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잠긴 때였다.
나와 같은 처지로 발이 묶인 몇몇 외국인들이 저 멀리 선착장 끝에 자리를 잡더니
끊긴 페리를 기다릴 겸 선텐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 와중에 선텐이라니.
호기로운 그들의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듯이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만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선착장 바로 앞 널찍한 카페에 들어가 밖이 잘 내다보이는 2층에 자리를 잡았다.
가까스로 열악한 와이파이를 잡아두고는 전투준비를 위해 배를 두둑하게 채워 넣었다.
푸짐한 기로스와 맥주 한잔을 시원하게 비워내고는
차근차근 눈앞에 떨어진 무거운 돌들을 하나 둘 정리해 나갔다.
막상 머리로 생각할 때는 답이 없던 막막한 문제들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하나 둘 정리되기 시작했다.
늘 예기치 못한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여행은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닥치면 살아나갈 구멍은 있다는 사실을.
막상 문제가 터지면 그 순간은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앉을 것 같다가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맞서게 되면 아무런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던 문제들마저도
결국엔 모두 제 자리를 찾아간다.
여행이 쌓여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웬만해선 어떤 문제가 닥쳐도 눈 하나 꿈적 않는 견고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복잡했던 문제를 말끔히 정리하고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책을 꺼내 보다가 문득 옆을 내다봤다.
산토리니의 푸른 바다와 저 멀리 쌓여있는 하얀 마을이 두 눈에 담긴다.
문득 그 순간,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든 꽉꽉 채우려던 내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때론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둬도 될 것을.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매일을 열심히 달렸던 걸까.
왜 동그랗게 꽉 찬 하루에서 한 칸의 빈 공간도 용납하지 못했던 걸까.
하루도 빠짐없이 야무진 여행 계획을 세우고 나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하루라는 시간이 허무하게 빠져버린 순간
나는 깨달았다.
시간의 흐름대로 자연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어떤 상황 앞에서도 동요치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행이야말로
진실로 완벽한 여행이라 말할 수 있음을.
나는 오늘 기나긴 기다림 그 사이에 서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바다를 끼고 책을 읽으며 산토리니의 바람을 맞아본다.
참 시원하다.
12시간의 기다림이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을까.
페리가 끊겼다는 사실을 들은 그 순간
모든 여행이 망가져버린 것처럼 주저앉아 버리고 싶던 그 순간
나는 지금 꽤나 낭만적인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그 시간들을 무언가로 가득 채우지 않아도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어느 한 시점이 산토리니에서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여유만 있다면,
긴 기다림도 아주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산토리니, 아무도 붙잡지 않는 시간이 서서히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