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다린 여행의 한 조각을 맞춘 날
가끔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 때가 있다.
높은 곳에 올라 그럴싸한 낯선 전경을 내려다보고싶어서라기 보단,
생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맛보고싶어서라기보단,
이미 반짝이는 햇살이
하늘 가득 물들어있는 늦은 아침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당연한 하루의 시작이 그리워서 말이다.
화려하고 그럴듯한 버킷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억지로 쉬어갈 틈을 쪼개어 만들지 않아도 되는
그렇게 나는 문득 붙잡아둘 필요 없이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들이 그리워
여행을 꿈꾸곤 한다.
깊은 잠에서 빠져나와 눈을 뜨자
포르투의 하늘은 이미 파랗고 또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더 이상 잠이 들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함인지
햇살은 새하얀 커튼을 투과할 만큼 강력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에 못 이겨 일어나서는
겉옷을 걸치고 아무런 목적 없이 밖으로 나선다.
가끔은 떠나온 여행에서도 진짜 여행을 꿈꾼다.
전날 빼곡하게 적어놓은 맛집 리스트와
수많은 랜드마크가 채워진 지도를 무심히 던져둔 채
이름 모를 골목 사이를 거닐고
무작정 사람이 많은 음식점 앞에 줄을 서보기도 하고
한참을 거닐다 발길이 머문 벤치에 앉아
얼만큼이고 쉬었다 갈 수 있는 그런 여행을 말이다.
억지로 내 감각을 깨울 필요가 없는
그 누구의 이야기도 스며들어있지 않은
그렇게 문득 마음이 이끄는 바에 들어가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은
세상 그 어떤 술보다 달콤할 수 없고,
우연히 눈에 들어온 카페에 들어가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잔은
내가 있는 이 순간을 기꺼이 여행하도록 만들어줄테니.
우린 가끔 특별할 것 없는 여행을,
그럴싸한 사진 한 장 건질 것 없는 시시콜콜한 여행을,
충분히 해봄직하다고 말하고싶다.
내가 그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리고 그곳에서 달콤한 시간을 채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계획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 덕분이었다.
정처 없이 거닐다 우연히 클레리구스 전망대 앞에 다다랐다.
한 번쯤 가봐야지라며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다 선뜻 들러보지 못했던 차에
오늘에서야 이렇게 마주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입구에서 티켓을 끊고선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다.
슬슬 숨이 차오를 때쯤 되자
드디어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널따란 포르투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붉은 지붕들이 도시 전체를 에워싸고
그 사이사이 무성하게 자란 푸르른 나무들이 도시를 채워 넣고 있었다.
붉은 물결 사이로 기다랗게 펼쳐진 도우루 강이
푸른 빛깔을 뽐내며 유유히 흘러간다.
전망대를 거닐며 포르투 시내를 바라보던 그때,
문득 커다란 녹색지대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붉은 지붕 아래로 한껏 채워진 푸르름.
저게 뭘까.
푸른 잔디밭이 드넓게 깔려있고
그 안에서 몇몇 사람들은
잠을 자기도, 노래를 듣기도,
뭔가를 마시기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따스하고 낭만적인 시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게 전부였지만
도저히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분명 강한 느낌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렇게 전망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곧장 위에서 봤던 푸른 카페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들뜬 걸음으로 카페 입구에 도착하자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푸른 잔디 곳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의 표정이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엔 세상 가장 푸르른 여유로움이
겉잡을 수 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짙은 여유로움이
곳곳마다 베어있다는 사실을.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이곳에 와야만 할 것 같던 느낌에 대한 확신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몽글몽글한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달콤한 노랫소리와 함께
반갑게 맞아주는 포르투 사람들이 활기를 더한다.
“Hello, Sweety!”
역시나 그랬다.
커다란 올리브나무가 그늘을 드리워주는
잔디밭에 자리를 잡는다.
머리 위로 살랑대는 바람마저 내 걸음을 반겼다.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토막으로
투박하게 짜여진 무심한 테이블과 의자는
푸른 잔디와 파란 하늘,
그 위에 떠있는 새하얀 구름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만큼이나 이런 곳에 어울릴 수 있는 건
칵테일 한 잔 이어야 했다.
이토록 달콤하고 낭만적인 순간에 어울릴 수 있는 건 그 달콤함을 배가시켜 줄 모히또 한 잔이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 서면 자꾸만 생각나는
독한 럼과 상큼한 라임, 그리고 진한 애플민트향이 골고루 베어있는 모히또 한 잔.
흘러나오는 노래에 몸도 마음도 흥겨움을 타는 사이,
새까만 피부에 낮은 목소리가 매력적인 바텐더가 거친 손놀림으로 눈앞에서 뚝딱 모히또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나는 이미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자독한 낭만에 제대로 취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웃음과 웃음이 끊이지 않는 시간.
흥겨움과 설렘이 멈추지 않는 시간.
모두가 포르투의 하늘과 바람을 즐기는
특별할 것 없는 여유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무엇보다도 이곳에서만큼은
한껏 나른한 몸을 푸른 잔디밭에 누이고
파란 하늘을 두고두고 봐야 한다.
이곳에서 해야 할 것은 오직 그 뿐이다.
한없이 낭만적이고
한없이 한가로운 그 순간을
그다지 특별하지 않게
또는 아주 새삼 특별하게
자유로이 채워 넣는 것뿐이다.
행복한 기억은 햇살을 따라 더 진하게 스며들고
무거웠던 기억은 바람을 따라 저 멀리 날아갈 테니.
어쩌면 포르투를 떠올리며
다시금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면
그건 순전히 오늘 때문이리라.
아무런 생각 없이 푸른 잔디밭에 누워
새하얀 구름을 따라가는 지금을,
순전히 내 느낌대로 살아가는 오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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