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진범과 납치
“화이트홀요?”
인협은 화이트홀이라는 말이 낯선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블랙홀(black hole)이라는 말은 들어보았겠지?”
인협이 얼른 대답 못 하자, 소유천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인협은 자신의 처지를 잊고 상대방을 깔보는 소유천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학창 시절에 배웠던 과학 지식을 얼른 떠올렸다.
“블랙홀은 엄청난 질량을 가졌던 별이 수축하여 생긴 우주의 구멍이 아닌가요? 따라서 거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압력이 생겨서 빛마저 빨아들인다는 공포의 흡입구, 그 정도의 지식은 상식이 아닙니까?”
“흠, 좋아, 낙제는 면했어. 화이트홀은 바로 그 블랙홀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하면 될 거야.”
“반대 개념이라니……도대체 무슨 뜻이죠?”
노인의 시험을 통과했다고 여겼던 인협은 다시 난관에 봉착한 듯 긴장했다.
“블랙홀이 우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면 화이트홀은 거꾸로 빨아들인 것을 뱉어놓는 우주의 배출구라는 말일세.”
“우주의 배출구요? 굉장히 생소한 이야기군요.”
인협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지 대충 맞장구쳐 주었다.“그럴 거야. 일부 천문학계에서도 화이트홀의 존재를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 정도로 여기고 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이 있으면 어디엔가 반드시 내뱉어내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이 우주의 섭리가 아닌가.”
“그렇군요. 흠, 상상 속의 화이트홀이라...”
인협이 화이트홀이라는 말을 음미하듯이 되뇌자, 소유천은 정색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화이트홀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그걸 어떻게 증명해요?”
“여기 있네.”
소유천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이 별장에요?”
“그래.”
소유천이 어찌나 진지하게 말하는지 인협은 저도 모르게 별장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의구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둘러보던 인협의 시선에 10개의 엘리베이터가 들어왔다. 하지만 인협이 일반 엘리베이터라고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자 소유천이 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아까 내가 자네에게 왜 엘리베이터를 손대지 말라고 면박을 주었는지 아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 10개의 엘리베이터가 바로 화이트홀의 연결 통로야.”
“연결 통로요?”
“그래. 화이트홀은 블랙홀이 집어삼킨 것을 다시 내뿜어내. 저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각각 가늠할 수조차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블랙홀 안에서 갇혀있던 온갖 것이 튀어나오네. 그러니 절대 저 엘리베이터를 함부로 열어서는 안 돼.”
소유천이 설명을 듣고 인협이 다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빛들이 명멸하는 엘리베이터가 금방이라도 열리면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르신 말은 지금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던 프레타도 저 블랙홀에서 뛰쳐나온 놈이라는 말이군요.”
“맞아.”
소유천은 무겁게 머리를 끄떡이었다.
“참, 어르신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헷갈리는군요. 좋아요. 일단 노인장 말씀이 사실이라 합시다. 그러면 어르신이 그 프레타를 날뛰게 풀어놓은 겁니까?”
소유천을 향한 인협의 눈빛이 매우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 모든 문제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비롯된 거야.”
“아까부터 자꾸 사람들 탐욕 운운하는데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생각 말아요. 아예 처음부터 화이트홀의 통로라는 이상한 별장이 없었으면 살인사건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인협은 마치 황금산 반장이 된 양 소유천에게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소유천은 도리질했다.
“원래 화이트홀은 만물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해. 그것은 우주의 섭리야.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들의 몫이라는 것을 왜 몰라?”
“그래서 어르신은 이 살인 사건에 대해서 정말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겁니까?”
어느새 인협은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서 처벌하겠다는 형사들 특유의 말투를 따라 하고 있었다.
“잠깐,”
그때 갑자기 소유천이 자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했다. 어두운 골목길에 웬 수상한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주위를 경계하면서 곧장 별장의 담장으로 다가왔다. 그자는 아이들이 낙서하던 문제의 담장 앞에 우뚝 섰다. 가로등 불빛에 의해 그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저 사람은……”
그자는 다름 아닌 골목 어귀에 살고 있는 모 대학교수 노수현이었다. 대학에서 동양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려진 노교수는 동네의 유지이면서 인자한 인품으로 평판이 아주 좋았다. 그런 노교수가 느닷없이 인적이 뜸한 심야의 시간에 문제의 담장 앞에서 서성이는 것이 무척 괴이했다.
“...”
노교수는 집안에서 인협과 소유천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이 벽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이글거렸다. 이윽고 노수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영희가 내 정체를 인협 그놈에게 까밝힐까 봐 납치는 해왔는데 영 재미가 없어. 다른 수를 내야지. 흐흐,”
노수현은 음흉하게 웃고는 늘 해왔던 것처럼 그는 주머니에서 백묵을 꺼내 담장에 쓰기 시작했다. 노교수의 손길이 지나간 투명유리에는 ‘아수라여, 나와라!’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아수라? 사이트에 있던 그 괴물?”
인협이 뜨악하는 사이에 노수현은 자신이 쓴 것을 흡족한 듯이 쳐다보다가 갑자기 양손을 모아 낙서를 향해 벌렸다.
그 순간 그것에 호응하듯이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엘리베이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엘리베이터 하나가 갑자기 정지했다. 정지된 엘리베이터의 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파란빛이 쏟아져 나왔다.
“엎드려!”
소유천이 소리치자,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인협이 얼른 거실 소파 뒤에 몸을 숨겼다. 곧바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거대한 물체가 안에서 뛰쳐나왔다.
머리가 세 개이고 팔이 여섯 개가 달린 갑옷 차림의 거한이 사나운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포효했다. 인협이 인터넷에서 보았던 그 아수라였다.
“크악!”
여섯 개의 팔로 각각 번쩍이는 검을 뽑아 든 아수라는 소파 뒤에 숨은 인협과 소유천을 못 보았는지 그대로 달려 나가 노수현에게 달려갔다.
맹렬히 포효하던 아수라는 웬일인지 노수현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바짝 엎드렸다. 노수현은 의기양양한 손짓으로 골목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아수라, 이번에는 성숙한 여자를 잡아 와! 반항하는 것들은 가차 없이 죽여도 좋다!”
“주인님의 명령을 당장 수행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살육하게 되어 아주 신이 난 아수라는 벌떡 일어나 노수현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포효하며 골목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안 돼! 저놈을 막아야 해!”
인협은 앞뒤 볼 것 없이 이층집을 뛰쳐나갔다. 그는 소유천이 뒤따라 나올 줄 알고 무작정 뛰쳐나갔는데 정작 소유천은 그러지 아니했다. 인협은 낭패스러웠지만 이왕 내친김에 일단 노수현의 앞에 우뚝 섰다.
“어?”
그의 난데없는 등장에 노수현은 무척 놀란 듯 아수라부터 찾았다. 하지만 아수라는 그사이 그의 명령을 수행하러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노수현, 그 천인공노할 짓 당장 그만둬!”
“인협?”
노수현은 느닷없이 등장한 인협을 보고 매우 놀란 듯했다.
“당신이 이런 몹쓸 짓을 벌일 줄이야.”
“자네 다 본 거야?”
“그렇소. 해골 인간, 아수라, 그 괴물들 모두 당신이 불러낸 것을.”
“그래?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노수현이 자기가 벌인 짓에 대해서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는 듯 태연하게 반문하자, 인협의 분노가 폭발했다.
“당신 참 구제불능이군.”
“난 그저 내 욕망을 위해서 사는 거야.”
“그럼 피해자들은 어쩌고?”
“그들은 피식자(被食者) 일 뿐이야. 난 포식자(捕食者)고. 허허,”
“이런, 벼락 맞을 나르시시스트 새끼!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겠군.”
어이를 상실한 인협이 급히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려고 하자 노수현이 느닷없이 크게 외쳤다.
“아수라, 당장 이놈부터 처치해!”
그의 호출이 끝나기 무섭게 행방이 묘연하던 아수라가 순식간에 노수현 앞에 재등장했다.
“크악!”
아수라는 노수현이 지목한 인협을 향해 번개처럼 네 개의 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으악,”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이 잘린 인협이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내지를 때 홀연히 중절모를 쓴 검은 물체가 아수라를 향해 돌진해 왔다.
“크억!”
그 순간 아수라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아수라의 배에 커다란 황금 지팡이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아수라는 고통스러워하며 여섯 개의 팔로 지팡이를 움켜쥐고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사이에 중절모의 사내는 인협의 몸을 가로막고 우뚝 섰다.
그러나 아수라가 용을 쓰자, 결국 지팡이는 코르크 마개처럼 그것의 배에서 튕겨 나갔다. 중절모의 사내가 손을 뻗자, 황금 지팡이는 그의 손에 다시 안착했다.
“이 자식! 죽여버리겠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수라는 난데없는 훼방꾼을 죽여버리려는 듯 다시 덤볐다. 하지만 중절모의 사내는 가볍게 아수라의 공격을 피하고 오히려 역공을 폈다. 아수라는 뒤로 밀리면서 으르렁댔다.
“대체 네 놈은 누구냐?”
“난 너 같은 요괴를 처치하는 뱀이다.”
음산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검은 중절모 밑에서 울려 나왔다. 인협이 자세히 살펴보니 며칠 전에 사건 현장에서 마주쳤던 사나이였다.
“뱀이라고요?”
인협이 아는 체를 하는 사이 아수라는 뱀에게 공격 자세를 취했다.
“뱀,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사람을 돕는 것이 나의 일이다! 네놈이나 썩 꺼져라! ”
다시 한번 뱀이 차디찬 목소리로 일갈하자, 아수라는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네 개의 검을 동시에 날렸다. 그러나 뱀은 허리춤에 걸쳐 있던 긴 채찍을 전광석화처럼 휘둘렀다. 채찍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검을 모두 부러뜨리고 아수라의 세 번째 손목을 단숨에 잘라버렸다.
“윽!”
아수라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그것의 손목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의기양양한 뱀의 채찍은 허공에서 잉잉거리며 다시금 아수라의 급소를 노렸다.
“이번에 네놈의 목을 날려버리겠다!”
뱀의 위협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아수라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너! 이번에 운이 좋았다. 두고 보자!”
아수라가 인협을 돌아보며 위협하자, 뱀의 채찍이 다시 그의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아수라 이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에잇!”
그러나 이번에는 아수라가 조금 더 빨랐다. 아수라는 급히 몸을 틀어 골목 밖으로 도망쳤다. 노수현도 앗, 뜨거워라! 하면서 아수라의 뒤꽁무니를 쫓아갔다. 어두운 골목 너머에서 더 강한 자에게 쫓겨 나가는 아수라의 거친 포효소리만 들려왔다.
“고, 고마워요. 뱀,”
잠시 후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지자, 인협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내 이름을 아는군.”
중절모를 고쳐 쓰던 뱀이 놀라는 시선으로 인협을 돌아보며 대꾸했다. 그의 두 눈에는 눈동자가 없이 흰자위만 번들거렸다. 그렇지만 왠지 선한 기운이 풍겨 인협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
“정의 사도인 당신을 어떻게 모르겠어요?”
인협이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뱀은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래요? 나중에 하늘의 심판관들에게 내 이야기나 잘해주시오.”
뱀은 인협에게 부탁하고는 미련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모든 일이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나서 인협은 마치 한 편의 악몽을 꾼 듯 싶었다.
이윽고 낙서의 비밀을 알아낸 인협은 당장 모든 것을 황 반장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골목길에 검은색 형사기동대 차량이 골목길에 들어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인협 앞에 급정거했다. 차 문이 벌컥 열리면서 황 반장을 선두로 형사 세 명이 쏟아져 나왔다. 인협 앞으로 단숨에 뛰어온 황 반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인협 씨, 수사 협조 바랍니다.”
“수사 협조요?”
“네. 긴급 제보가 들어와 정인협 씨의 집을 수색해야 될 것 같습니다.”
황 반장의 느닷없는 요구에 인협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우리 집을 수색한다고요?”
“그렇소.”
“대체 그 제보라는 것이 뭡니까?”
“지난번 현금 수송차가 괴한에게 엄청난 현금을 탈취당했는데 그 현금들이 정인협 씨에 숨겨져 있다는 제보입니다.”
황 반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구체적으로 설명하자 인협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내가 현금 탈취범이라는 소리? 세상에, 말도 안 돼!”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가택수색을 해보면 알 수 있어요.”
황 반장은 수사관 특유의 어조로 인협을 압박했다.
“물론 그렇지만 이건 강압수사입니다.”
“나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정인협 씨가 떳떳하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황 반장은 집요하게 그를 압박했다. 인협도 자신이 워낙 떳떳하기 때문에 굳이 가택수색을 거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좋아요. 맘대로 하세요.”
그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 반장이 데리고 온 형사들이 인협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가시죠.”
황 반장은 인협을 앞세우고 그의 집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인협은 속으로 수색이 끝나면 무고한 자기를 대놓고 의심한 황 반장과 대동한 형사들에게 따끔하게 혼줄을 내 주기로 단단히 별렀다.
그런데 인협이 자기 집 대문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형사 한 명이 급하게 튀어나왔다.
“반장님, 3층 정인협 방에서 현금 행랑이 세 개 발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