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번지수가 잘못된 애인, 향귀(香鬼)
나는 즉시 휴대폰의 렌즈를 주시하였다. 나의 강렬한 시선을 감지했는지 은색의 원형 테두리에 불꽃이 생기더니 차례로 돌기 시작했다. 잠시 후 휴대폰의 액정에서 한줄기 남색 빛이 허공으로 발산되기 시작했다.
남색 빛줄기는 놀랍게도 방의 천장까지 퍼져나갔다. 빛줄기가 방안에 가득 차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서 강력한 불빛이 카메라의 플래시처럼 번쩍했다.
너무나도 강렬한 섬광 때문에 나는 잠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4~5초 정도 지나자, 시야가 다시 트였다. 방바닥에서 거대한 불꽃이 활활 타올라 왔다. 나는 처음에는 화재가 난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젊은 여자의 형체였다.
내 방안에 느닷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젊은 여자는 착 달라붙은 불꽃 무늬의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과 잘록한 허리선을 자랑하는 여인은 나의 온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만큼 완벽하게 쭉쭉 잘빠졌다.
갸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자.
하지만 그녀의 예쁜 외모에는 왠지 모를 냉기와 묘한 독기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누, 누구요?”
갑작스러운 여자의 등장에 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정체불명의 여자는 나를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전 향귀라고 합니다.”
“향, 향귀?”
“주인님이 나를 불러서 서둘러 나왔습니다.”
“내가 당신을 불렀다고?”
“네. 조금 전에요. 저 렌즈를 통해서요.”
향귀는 책상 위의 휴대폰을 하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다시 미묘한 시선으로 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만족한 듯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러나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여자의 주목을 받는 것이 거북스러워서 미간을 찌푸렸다.
“난 아마라가 올 줄 알았는데...... 휴,”
나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향귀는 비윗살 좋게 나를 전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아마라요? 아마라는 나오지 못해요.”
“아마라가 못 나오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나도 모르게 실망한 표정으로 향귀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향귀가 비웃듯이 웃었다.
“아마라는 지금 주인님이 불러낼 수 있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흠. 진실을 말하자면 주인님의 성향에 잘 맞는 여자는 바로 접니다.”
향귀는 단호하게 내뱉고는 나에게 다가와서는 그녀의 하얀 얼굴을 도발적으로 쭉 내밀었다. 아름다웠지만 왠지 독기가 강하게 풍겼다.
“아니야!”
“제 말을 못 믿겠으면 저 휴대폰을 보세요!”
자존심이 상했는지 얼굴이 빨개진 향귀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휴대폰 액정 위에 그려진 원형 테두리의 한 곳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파란빛이 귀(鬼)라는 한자(漢字) 위에 머물고 있지요. 그곳이 바로 내가 나온 곳입니다. 주인님의 성향이 선택한 곳이기도 하지요. 또한 그 세계의 주인공은 주인의 선택이 있어야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죠. 그런데 전 영광스럽게도 주인님의 선택을 첫 번째로 받아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난 향귀 당신을 원한 적이 없는데.”
나는 손을 내저으며 향귀의 말을 대놓고 부정했다.
“자꾸 현실을 부정하지 마세요. 주인님은 얼굴보다 몸매를 더 중요시하잖아요!”
향귀의 지적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반문했다.
“그럼 지난번 내가 땅속에 매몰되었을 때에는 아마라가 제일 먼저 달려왔었는데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주인님이 땅속에 매몰되었을 때 휴대폰 속에서 대기 중이던 우리 열 명의 형제자매들은,”
“형제자매가 열 명이나 된다고?”
깜짝 놀란 낸 눈이 등잔만 해졌다. 향귀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주인님의 애인은 자그마치 열 명이나 되죠. 행복하시죠?”
“세상에,”
애매모호한 탄성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쨌든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주인님이 구조 요청하기 위해서 외부에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면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인님의 취향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가장 고상한 아마라를 설득해서 제일 먼저 내보낸 거예요. 아마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뛰어난 재주가 있거든요.”
“그럼 아마라가 미끼였다는 말?”
“네.”
나는 맥이 풀렸다. 내가 실망스러워하는 모습이 너무 안되어 보였는지 향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하지만 아마라도 우리 형제자매니까 언젠가는 한번 정도 볼 수는 있을 거예요.”
“그 말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군.”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런 나를 보고 향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주인님의 성향으로는 아마라를 다시 부를 수 없을 거예요. 주인님에게는 제가 최상입니다.”
말을 마치고 내게 슬쩍 잉크를 보내는 향귀에 화가 난 나는 언성을 높였다.
“성향을 떠나서 아마라는 나의 생명을 구해준 여인이야!”
“하지만 아마라는 고상하기는 하지만 눈이 아주 높아서 고상한 성향이 아니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다시 염장을 지르는 향귀에게 나는 애써 밝은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렇다면 내 성향을 높여야겠군.”
"흥, 그게 쉽게 될까요?”
“향귀 너는 나의 경애(境涯)를 너무 낮게 보는군.”
“그게 아니라 주인님은 저의 화끈한 매력 때문에 아마라를 금방 잊을 텐데요. 호호,”
자신감 있게 말을 마친 향귀는 서서히 다가오더니 갑자기 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차갑지만, 탄력 있는 향귀의 몸이 뱀처럼 나의 전신을 감고 들어왔다. 진짜 사람과 똑같은 질감과 무게감에 나는 경악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얻을 수 없는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세요. 차라리 저하고 일체가 돼요. 제가 지상 최고의 쾌락을 줄 게요. 호호,”
정말 향귀의 몸뚱이는 내가 걸치고 있는 옷처럼 딱 붙어서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녀와 거의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면서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나의 한 부분을 다시 찾아서 맞춘 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나의 몸을 칭칭 감은 향귀는 나의 마음마저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 내게 깊고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저는 저항 하지 않았다.
그렇게 향귀의 붉은 입술과 풍만한 유방이 의해 내가 서서히 점령하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느닷없이 아내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여보, 큰일 났어! 웬 낯선 남자들이, 어?”
밖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호들갑을 떨며 방 안으로 들어서던 아내는 서로 얽혀있는 나와 향귀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게 무슨 짓들이야?”
“여. 여보?”
예상치 않은 아내의 등장에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향귀에게 달려드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열린 방문으로 권총을 거머쥔 낯선 남자 두 사람이 갑자기 뛰어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얼마 전에 피에로를 덮쳤던 ‘화이트홀’ 사의 그 단속요원들이었다.
“꼼짝 마!”
“아니, 이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라니까!”
아내는 자기 남자하고 얽혀있는 정체불명의 여자를 발견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던 차에 난데없이 뛰어든 불청객들의 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겁 없이 쏘아붙였다. 하지만 단속요원들은 아내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당신을 화이트홀사의 첨단기술을 불법 사용한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사내중에서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진 남자가 내뱉으며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어 들었다. 그 순간에도 아내를 의식한 나는 빨리 향귀가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간절하게 바랐다.
다행히 향귀도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내는 머리끄덩이를 쥐고 흔들어도 시원치 않을 대상이 갑자기 눈앞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지자 기겁했다. 그러나 곧 낯선 남자들이 나를 잡아가려는 사태를 알아채고는 겁 없이 그들에게 대들었다.
“당신들이 뭔데 내 남편을 잡아가?”
아내의 호통에 수갑을 들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아내를 노려본다.
“우리는 우주기술을 보호하는 화이트홀사에서 파견된 단속요원들이요. 당신 남편처럼 저 입체 휴대폰을 불법 거래하는 자들을 단속하는 게 우리 임무요.”
“입체 휴대폰?”
아내의 놀란 눈빛이 곧바로 책상 위의 휴대폰으로 날아갔다. 책상에서 휴대폰을 수거하려던 눈매가 날카로운 다른 요원이 아내에게 설명했다.
“그렇소. 당신 남편은 지금 장물(贓物)을 취득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장물(贓物)이라니? 난 그딴 것 몰라! 난 단지 피에로부터 휴대폰을 산 것뿐이요.”
내가강력하자 항변하자 그자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에로는 화이트홀 사(社)의 신제품을 빼돌리는 아주 악질적인 도둑이야. 전 우주에 수배가 됐소. 따라서 그 장물을 산 당신도 책임을 면할 수가 없어!”
그자는 사납게 말을 내뱉고는 수갑을 채우기 위해서 거칠게 내 손목을 낚아챘다.
“난 모르는 일이야!”
나는 악을 쓰며 수갑을 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다시 우악스럽게 내 팔목을 잡아당겼다.
“억!”
그런데 기세등등하던 사내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수갑도 벽을 향하여 무섭게 날아가 벽에 부딪힌 뒤 방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누구야!”
손을 다친 사내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문제의 피에로가 총을 겨누고 서서히 방 출입문에 서 있었다.
“이 자식이 겁도 없이!”
책상 쪽에서 서 있던 사내가 피에로를 알아보고 재빨리 권총을 겨누었다. 그 순간 이번에도 피에로의 총이 한 발 더 빨리 발포되었다. 그자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그의 총도 멀찌감치 튕겨 나갔다.
“모두 내 사격 솜씨를 잘 알지? 얌전히들 있어!”
하얗게 분장한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총을 겨누고 협박하는 피에로의 목소리는 매우 날카로웠다. 겁에 질린 두 사내가 뒤로 비척비척 물러나자, 피에로는 흘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 거요?”
“뭘?”
피에로의 의중을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자 그는 총구로 책상에 놓인 휴대폰을 가리켰다.
“이대로 아마라를 포기할 거야?”
“......?”
비로소 나는 피에로의 의도를 파악했지만,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아내의 시선 때문에 우물쭈물 대답을 못 했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하다는 듯 피에로는 내뱉었다.
“향귀와의 밀회가 자네 부인에게 들통났으니 자네도 이제 무사하지 못할 텐데.”
“내가 무슨 밀회를 했다고 그래? 나는 유혹당한 거야.”
“그것을 자네 아내가 믿겠나?”
“젠장,”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마라를 찾아 나서라고!"
“......!”
“빨리 그 휴대폰을 들고 도망가! 저 녀석들은 내가 붙잡고 있을 테니까.”
피에로의 재촉에 나는 슬쩍 아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이미 피에로의 말뜻을 알아챈 아내의 두 눈에서 파란 불꽃이 번쩍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발끈한 아내는 나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젊은 시절 성처녀처럼 착하고 순진했던 아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긴 세월 속에서 어느덧 야차로 변한 아내가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겁에 질려 꼼짝 못 하자 피에로는 다시 고함을 치며 재촉했다.
“빨리 도망가! 꾸물거리다가는 자네 마누라 손에 죽는다고!”
마침내 나는 그의 경고대로 일단 퍼붓는 소나기는 피하자는 판단이 들었다. 결단을 내린 나는 재빨리 책상에 놓여있는 휴대폰을 낚아챘다.
피에로는 나의 결정에 매우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짓고는 단속요원을 향해 총구를 다시 확실히 겨누었다. 총앞에서 꼼짝 못 하게 된 선글라스 사내는 나를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네가 어디로 도망가든 우리 조직의 추적을 벗어나지 못 한다!”
선글라스의 으름장에 화가 난 피에로는 그자의 머리 위로 권총을 발사했다.
“한 번만 더 그 주둥아리를 나불거리면 그때는 정말 지옥으로 보내버리겠어!”
피에로의 경고에 선글라스 사내가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내에게 돌아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여보, 곧 돌아올게.”
“대체 어딜 간다는 거야? 안 돼!”
아내는 강하게 도리질하며 나의 무단가출을 막았다.
“난 당신 잔소리에 말라 죽을 수 없어!”
두려운 듯이 내뱉은 나는 내 손을 잡아당기는 아내를 밀치고는 쏜살같이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내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순간 나는 멈칫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기에 어쩔 수 없이 대문 밖으로 미친놈처럼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