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내겐 너무 뜨거운 애인
어쨌든 나는 아마라를 찾아보겠다고 집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냥 한동안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참 막막했다.
홧김에 집 나간 여자들의 마음이 이럴까.
더욱 최악인 것은 지갑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렇다고 제 발로 뛰쳐나온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휴대폰은 어느 사이에 애인 찾기 모드(mode)로 바뀌어져 있었다.
기대에 찬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휴대폰의 렌즈에 머물렀다. 그때 렌즈에서 무엇인가 작은 불빛이 번쩍인다.
“......?”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내가 다시 친구들의 번호를 다시 훑어본다. 그때 커다란 검은 우산을 쓴 누군가가 가랑비를 뚫고 내 쪽으로 급히 걸어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비가 와서 그런지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먼 곳에서 보아서 그런지 흐릿했다. 그런데 남자가 나랑 시선이 마주치자 갑자기 뛰다시피 걸어왔다. 그의 왼손에 또 다른 우산을 들려있었다.
하지만 나는 낯선 남자에게 길을 터줄 생각으로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그런데 그 남자가 내 앞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내게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주인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당, 당신 누구요?”
뜻밖의 상황에 나는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그러자 남자는 재빨리 허리를 폈다. 동시에 들고 있던 커다란 우산을 재빠르게 펴더니 나를 씌어주었다. 트렌치코트에서 삐져나온 그의 손이 무척 야위어 보였다. 젊은 사람 같지 않게 얼굴도 바짝 말라 있었다.
“어? 사람 잘못 본 것 같은데요.”
내가 두려운 듯 우산에서 얼굴을 살짝 빼내며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주인님을 모시기 위해서 나온 사람입니다.”
“당, 당신은 누구길래 자꾸 나를 주인이라고 하는 거요?”
내가 남자도 혹시 아마라와 같은 부류가 아닌가 싶어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젊은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전 돈노입니다. 저곳에 살고 있죠.”
돈노는 손가락으로 내 휴대폰을 가리켰다. 내가 그곳을 흘끔 돌아보자, 餓(아)라는 한자가 써진 그곳에 파란 불빛이 반짝거렸다.
“그럼 당신도 아마라를 알아요?”
내가 돈노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묻자,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었다.
“네. 그리고 말씀을 놓으십시오. 주인님,”
“그, 그래. 그런데 아마라는 안 나오고 돈노가 여긴 웬일이지?”
나는 돈노 대신 아마라가 필요하다는 내 절박한 심정을 담아 질문을 던졌다. 돈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는 주인님에게 돈을 드리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주인님은 지금 아마라를 찾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잖아요?”
돈노는 나의 깊은 속사정을 소름이 날 정도로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건 그래.”
나는 돈노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지만, 돈이 절실히 필요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가 돈 좀 마련했습니다. 휴대폰을 열어서 주거래 은행 계좌를 열어보십시오.”
돈노는 종복(從僕)답지 않게 내게 눈을 찡긋하며 휴대폰을 다시 가리켰다.
나는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열었다. 거기에 언제 만들었는지 내 주거래 은행 앱이 있었다.
자동 로그인을 통해 앱을 열었더니 놀랍게도 그 계좌에 자그마치 1억 원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1억 원? 이 거금이 누구 돈이야?”
“그 돈은 주인님 거예요.”
돈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었다.
“내 것이라고?”
흥분과 두려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돈노에게 반문했다. 그 대답으로 그는 내게 얼굴을 내밀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 일단 저랑 같이 ATM기가 있는 곳으로 가시죠.”
돈노는 말을 마치고는 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나는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하지만 나는 돈의 유혹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나는 돈노가 발견한 ATM가 있는 근처로 마지못해 이끌려갔다. 그런데 ATM기를 전방 2~3미터 앞두고 갑자기 멈춰 섰다.
“주인님은 굳이 드러날 필요가 없으니 망이나 보세요. 하지만 반경 10미터 이상 벗어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제 존재가 사라지니까요.”
돈노의 약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알았어. 그런데 괜찮겠지?”
얼떨결에 돈노를 따라 ATM까지 따라왔지만 난생처음으로 범죄에 동참하는 것이라 좀 두려웠다.
하지만 돈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내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각지고 마른 얼굴은 흉했지만 매우 믿음직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ATM에 부착된 카메라가 너를 다 찍을 텐데.”
내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다시 말하자 돈노는 씩 웃었다.
“인간들이 만든 ATM기는 나를 찍을 수 없어요. 설사 찍는다고 해도 그들은 내가 있는 곳을 모르죠.”
말을 마친 돈노는 ATM기 옆에 있는 작은 편의점에 들어가 종이백을 구입하고는 곧바로 ATM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망을 보면서 흘끔흘끔 돈노가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돈노가 제법 두툼해진 종이백을 들고 내게 돌아왔다.
“우선 5천만 원을 찾아왔습니다.”
돈노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제법 묵직한 종이백을 내 손에 들려주었다. 내가 재빨리 종이백을 건네받고 열어보았다. 정말 종이백 안에 5만 원짜리 노란색 지폐가 가득했다.
“이, 이것 범죄인데.”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돈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돈노는 깜짝 놀라더니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범죄라고요? 저는 주인님이 저를 칭찬해 주실 줄 알았는데요.”
“칭찬할 일이 따로 있지. 이렇게 남의 돈을 훔치다가는 감옥에 가서 콩밥을 먹는다고!”
“아하, 지금 돈이 싫으신 게 아니고 나중에 경찰에 잡혀갈까 봐 걱정하시는 거죠?”
돈노는 그제야 비로소 내 걱정의 뿌리를 알았다는 듯 서운한 표정을 풀고는 밝게 웃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 CCTV는 내 모습을 찍을 수가 없어요.”
“그래도 찜찜해.”
체면상 나는 돈노의 설명에 금방 웃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돈노가 더욱 은밀하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은 절대 안 잡혀요.”
“......”
나는 돈노의 유혹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그것을 수락이라고 여긴 듯 돈노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님, 언제든지 돈이 필요하시면 저를 불러주세요.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돈노는 내게 백지수표나 다름없는 엄청난 약속을 남기고는 처음에 왔던 것처럼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빗속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엉겁결에 거금이 담긴 종이백을 건네받은 나는 주위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범죄 현장을 떠났다. 마치 금방이라도 청원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나를 쫓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돈노의 호언장담 대로 아무도 나를 잡으러 오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당분간 모텔에 숙박할 생각으로 약간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내가 제일 고급스럽게 보이는 호텔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낯선 남자 두 명이 나를 바짝 따라오기 시작했다.
“......”
나는 진작부터 그들의 존재를 느꼈지만,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으슥한 골목길에 행인이 없자 두 놈 중 한 놈이 감자기 뛰어와 나를 앞지르더니 내게로 돌아섰다. 왼쪽 뺨에 칼자국이 길게 난 험상궂은 30대의 사내였다.
“당신, 잠깐, 나 좀 보지!”
“당, 당신, 누구야?”
나는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나는 곧 뒤따라온 꽁지머리 다른 사내가 나를 가로막았다. 나는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말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가 덜덜 떨자, 내 앞길을 막았던 칼자국의 남자가 잭나이프를 꺼내어 나를 겨누며 협박했다.
“우리? 그건 알 것 없고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종이백만 넘겨주면 목숨은 살려줄 거야.”
“강, 강도?”
돈은 냄새를 풍긴다더니 놈들은 정말 귀신처럼 돈 냄새를 맡았다.
“섭섭하군. 돈 좀 나눠 쓰자는데 강도라니...... 잔말 말고 그것 이리 내놔!”
칼자국의 남자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 종이백을 확 낚아챘다. 그러고는 종이백을 열어보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이야, 오늘 대박이다!”
그의 환호성에 내 뒤를 막고 있던 꽁지머리도 덩달아 좋아했다. 내 돈을 보고 희희낙락하던 칼자국 얼굴이 갑자기 정색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이 많은 돈을 빼앗기고 네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칼자국 얼굴이 의구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중얼거리자, 꽁지머리가 대꾸했다.
“맞아, 일단 휴대폰부터 압수하자.”
그 말을 마치고 꽁지머리는 서둘러 내가 쥐고 있던 휴대폰을 빼앗으려고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빼앗기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했다.
“어, 이 자식 봐라?”
꽁지머리는 나의 저항을 예상치 않았는지 당황하더니 곧바로 내 배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휴대폰은 엎어져 있는 내 눈앞으로 떨어졌다.
“아아,”
나는 배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휴대폰의 렌즈를 주시했다. 그것을 보고 칼자국이 잭나이프를 들고 내 등에 올라탔다.
“이 골치 아픈 새끼 아예 죽여버리자!”
광기에 휩싸인 칼자국 사내가 정말 나를 죽이려는 듯 잭나이프를 내 목에 갖다 댔다.
“......!”
그때 내 앞에 돈노가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엇?”
칼자국 사내도 자기 앞에 난데없이 돈노가 소리 없이 나타나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떨거지들이 따라붙을 줄 알았어.”
돈노가 두 남자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칼자국 남자는 돈노를 그저 평범한 젊은 사내로 여긴 듯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야, 죽기 싫으면 저리 꺼져!”
그러나 돈노는 그자의 경고를 무시하더니 갑자기 트렌치코트를 그 앞에 쫙 펼쳤다. 두 남자의 앞에 거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돈노의 몸이 확 드러났다. 거의 해골 수준이었다.
돈노의 흉측한 모습에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한 눈치 빠른 꽁지머리는 혼비백산하여 그대로 도망을 쳤다.
“네가 뛰어야 벼룩이야. 흐흐,”
징그러운 웃음을 짓던 돈노가 그자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순식간에 아귀처럼 커진 그의 입에서 거대한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그 화염은 꽁지머리를 정확하게 덮쳤다. 엄청난 열기를 내뿜는 화염은 삽시간에 그 꽁지머리를 산 채로 태워 버렸다.
돈노는 그자를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버리고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도망칠 엄두도 못 내고 그저 벌벌 떨고 있는 칼자국 사내에게도 화염을 쏘았다.
그자 역시 순식간에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재로 변하고 말았다. 난데없이 골목 바닥에 하얀 재로 쌓아진 두 개의 작은 봉오리가 생겼다.
“이, 이럴 수가!”
그 처참한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나는 너무 놀라 탄식만 할 뿐이었다.
그때 두 명을 순식간에 해치운 돈노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머리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나는 돈노가 무서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돈노는 땅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줍더니 내게 내밀었다.
“주인님을 괴롭게 한 녀석들을 모조리 해치웠습니다.”
“고, 고마워, 돈노,”
하얗게 얼굴이 질려 버린 내 모습을 보고 돈노는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용히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또? 굳이 그,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진심을 담아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필요 없기는요? 이 험한 세상에서는 이놈들보다 더 악랄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헤헤.”
돈노는 고집스럽게 대꾸하며 해해거렸다.
방금 전의 섬뜩한 모습은 모두 사라졌지만, 아마라 하고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그의 모습에 나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난 갈 곳이 있다. 날 따라오지 마라!”
“네. 어차피 그 휴대폰 속에 있는데요.”
“젠장,”
나는 화난 표정을 짓고 돌아서려다 골목길 끝에 있는 전봇대에 달린 CCTV를 발견하고는 다시 돌아섰다.
“돈노, 저기 신호등에 달린 CCTV는 정말 괜찮겠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 CCTV는 이 현장을 못 찍어요. 제가 미리 차단막을 쳐 놓았거든요.”
“나도 안 찍히는 거지?”
내가 걱정스러운 듯이 다시 확인하자 돈노는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까짓것 경찰이 나타나면 뭐 어때요? 내가 모조리 불로 태워 구이로 만들어버릴 텐데요. 히히,”
돈노의 자신감에 비례하여 내 가슴은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아마라는 이토록 살벌하지 않을 텐데. 왜 아마라는 안 나타나고 엉뚱한 녀석만 자꾸 꼬이는 것일까?)
생각과 다른 현실에 괜히 서글픈 마음이 들면서 나는 아마라의 흔적이라도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마라의 고운 자태가 아니라 선글라스를 낀 검은 정장 차림의 또 다른 사내였다.
그자는 돈노의 살인 현장을 포착하고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