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명의 애인과 잘 사는 법

8회: 열 애인은 하나에서 시작되다.

by 김정걸

하지만 나는 곧 벽에 막혀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었다. 아수라는 득달같이 달려와 내 멱살을 거칠게 거머쥐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아!”

“그, 그게,”

나는 두려움에 혀가 마비되어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아수라의 뜨겁고 역겨운 숨이 내 입속으로 폭풍처럼 밀려 들어왔다.

“내가 불사신인 것 몰랐어?”

“불사신?”

“그렇다. 난 당신의 그림자야. 날 죽여도 난 다시 살아난다고! 이번에는 당신이 죽을 차례야!”

오만방자한 아수라는 눈을 부라리며 내 멱살을 쥔 주먹에 불끈 힘을 주었다. 순간 목이 꽉 막히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체념할 때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당장 그만둬! 아수라!”

방해를 받은 아수라는 극도로 화가 났는지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감히 나를 방해하는 게!”

아수라 앞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 지용(地涌)이다!”

지용(地涌)이라는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비록 성난 얼굴이었지만 준수한 외모였다. 또한 범상치 않아 보이는 눈빛에 보살의 자비로운 같은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도 아수라를 잘 아는 것을 보니 아마 휴대폰 속에서 튀어나온 존재이리라. 아무튼 지용(地涌)은 왠지 나를 해칠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주인을 죽이면 네가 아무리 불사신이라도 너도 죽는다.”

“네가 뭘 안다고 나서?”

아수라는 여전히 내 멱살을 풀지 않고 지용에게 사납게 으르렁댔다.

“이놈! “본체가 죽으면 그림자인 너도 죽는다!”

지용의 질타에 그제야 새삼 놀란 듯 아수라는 슬그머니 나의 멱살을 풀었다.

새파랗게 변했던 나의 얼굴에 비로소 피가 돌았다.

그 사이 지용은 아수라와 나의 틈으로 밀고 들어오더니 아수라를 세게 밀쳐냈다. 거한 아수라는 지용 앞에서 웬일인지 꼼짝 못 했다. 지용은 쐐기를 박으려는지 한번 더 아수라를 매섭게 꾸짖었다.

“너는 항상 그 급한 성격이 문제야!”

“하지만 주인님이 먼저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구차한 변명 필요 없어! 빨리 네 굴로 돌아가 근신하고 있어!”

다시 한번 지용이 무섭게 질타하자 아수라는 나와 지용의 얼굴을 착잡한 시선으로 번갈아 보더니 어느 순간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봐,”

아수라의 황포에서 겨우 살아난 내가 뭔가 더 물어보려고 다가서자, 지용은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얼른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 바람에 그만 맥이 풀린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만 내쉬었다.

“젠장, 대체 아마라는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는 거야?”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죄 없는 머리털만 잡아 뜯던 내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왔다.

“아, AS!”

환호성을 지른 나는 곧바로 휴대폰의 뒷면을 뒤집어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그곳에 깨알처럼 작게 써놓은 전화번호가 있었다. 아마 고객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게끔 일부러 그렇게 해놓은 것 같았다.

“옹졸하고 치사한 놈들!”

나는 얼굴도 모르는 화이트홀사 기술진을 비난하고는 그 전화번호가 제대로 작동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대여섯 울렸는데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다시 걸었다. 그래도 아무런 수신음이 없었다.

그대로 포기할까 하다가 오기가 발동해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마찬가지 상황이라 그만 포기하려고 할 때 누군가 전화를 받는 느낌이 났다.

“여보세요?”

나는 금방이라도 전화가 끊어질까 봐 서둘러 수신자를 찾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잠시 후 휴대폰에서 한 줄기 영상이 새어 나왔다. 내가 놀라 뒤로 물러서자 그것은 곧 놀랍게도 피에로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홀로그램 입체영상이었다.

피에로는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생뚱맞은 모습에 나는 다짜고짜 피에로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피에로! 이 사기꾼아! 어떻게 내게 엉터리 물건을 팔아먹을 생각을 해!”

나의 질타에 비록 영상이었지만 피에로의 감정이 삽입되어 있는지 나의 핀잔에 기분 상한 듯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고객님, 대체 뭐가 문제인데 이 난리입니까?”

“대체 왜 아마라는 안 나타나는 거야?”

“그거야 고객님의 마음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나에게 되려 핀잔을 주려던 피에로는 고객과 싸우지 말라는 세일즈맨의 강령을 상기한 듯 얼른 태도를 바꾸었다.

“이런 문제의 대부분은 고객님들이 매뉴얼을 잘 읽어보지 않아서 생긴답니다.”

“매뉴얼을?”

“네. 여기를 잘 읽어보세요.”

피에로는 말을 마치고 자기 옆에 떠오른 또 다른 매뉴얼 화면을 띄우고는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 부분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

잠시 후 매뉴얼을 다 읽은 나는 계면쩍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피에로에게 물었다.

“정말 아수라 향귀 등을 다 불러야 하는 거야?”

“네. 당신의 애인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와야지 아마라를 볼 수 있어요.”

피에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것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던 나로서는 그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별 수 없군. 그런데 더 이상 아수라를 내 애인이라고 하지 마!”

나는 진저리 치면서 되받아쳤다. 애인도 애인 나름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 아무리 흉한 놈들이 있다고 해도 그건 당신 모습이에요. 그러니 당신 애인이죠. ”

피에로의 설명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의 렌즈를 바라보고는 원형 테두리의 가운데에 있는 바를 세게 한 바퀴 돌렸다. 마치 금고 다이얼을 돌리는 듯한 소리가 멈추자 이윽고 휴대폰이 작동하는지 현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러고는 미묘한 음률과 함께 각각의 9계(구界)에서 그 주인들이 하나둘씩 내 방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번 향귀요!”

제일 먼저 향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며 요염한 자태를 드러냈다. 향귀에 뒤이어 우직하게 생긴 사내가 튀어나오며 “2번 우마(牛馬)요!”하고 소리쳤다.

돈노는 세 번째로 여전히 앙상한 몸에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내 앞에 위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녀석도 아직 나에게 유감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식으로 4번 아수라, 5번 인범, 6번 천녀, 7번 성오, 8번 연오, 9번 지용이 힘찬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면서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대했던 아마라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실망했다.

어쨌든 처음으로 동시에 한 곳에 모인 그들은 속상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특히 향귀, 아수라, 돈노들은 자기들을 죽이려 했었던 나에게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수라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이를 부드득 갈고는 달려들었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했어. 가만두지 않겠어!”

하지만 이번에도 지용이 잽싸게 나서서 아수라를 제지했다.

“아수라,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내가 너를 벌하겠다!”

자비롭지만 힘이 있는 지용의 경고에 아수라는 돌아서서는 제 가슴만 주먹으로 탕탕 쳤다.

겨우 위기를 면한 나는 ‘내 애인’이라고 하는 것들이 다 나왔는지 기생 점고하듯이 하나씩 점검했다.

“향귀, 우마, 돈노, 아수라, 인범, 천녀, 성오, 연오 그리고 지용, 그런데 아마라는 왜 안 나오지?”

나는 매우 실망한 얼굴로 피에로를 돌아보았다.

“혹시 아마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아마라요? 이미 나왔는데요.”

피에로는 히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어디 있다는 거야?”

깜짝 놀란 나는 피에로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피에로는 손을 들어 9계의 주인들을 가리켰다.

“쟤들이 아마라예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피에로가 다시 나에게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피에로, 장난하지 마!”

“나도 장난 아니라고요!”

이례적으로 피에로도 화를 버럭 냈다. 너무나도 진지하게 화를 내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피에로도 얼른 진정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피에로는 새삼 9계의 주인들을 슬쩍 살펴보고는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쟤네들은 우리 화이트홀사 기술진의 실패작이에요.”

“실패작?”

“쉿, 쟤들이 들어요!”

“알았어. 계속 말해봐.”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피에로를 재촉했다. 특히 번쩍이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는 아수라를 의식하면서 말이다.

“우리 기술진이 그 입체 휴대폰을 처음 설계기 전에 인간의 마음을 탐색했어요.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 9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있는 존재들을 복사해 냈어요.”

“그게 저놈들이었군.”

나는 차츰 우리들 얘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는 일부 애인들을 흘끔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 그래서 그 기술진들도 그것들을 9개의 홀로그램으로 재현했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 휴대폰에 복사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입체 휴대폰이 다 완성되고 난 후에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최고로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그곳의 존재가 아마라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거죠. 즉 원래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세계가 9개가 아니라 10개였던 거죠. 그래서 실수를 인정한 기술진은 일단 그곳에 '0'번을 부여했어요.”

“소위 첨단 기술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실수를.....”

나는 탄식을 했다. 피에로도 처음으로 멋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당황한 기술진들이 재현 설계를 수정하려고 했지만, 그 비용이 천문학적이라 다시 추가할 수도 없었어요. 수많은 연구를 하면서 고민하던 기술진들은 어느 날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9개의 존재를 하나로 합쳐보니 그게 놀라게도 아마라가 되는 거예요.”

“뭐? 아마라가 쟤네들의 통합체라고? 그럴 리가?”

뜻밖의 사실에 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지만 피에로는 단호했다.

“네. 아마라는 향귀부터 지용까지 합쳐져야지만 나타나는 귀하고 특이한 존재입니다.”

“믿을 수가 없어. 나의 아름다운 아마라가 어떻게 저런 놈들의......”

나는 어이가 없어 피에로의 설명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피에로는 기분이 상한 듯 툭 쏘아붙였다.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되잖소?”

“좋아, 그렇게 하지. 그런데 쟤네들을 어떻게 합치겠다는 거야?”

“그건 우리 기술진이 나중에 개발한 통합 버전판을 이용하면 됩니다.”

“설마 나보고 돈 더 내고 그것을 또 사라는 소리는 아니지?”

나는 또다시 속일 수 없다는 듯이 미리 단호하게 반문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 그건 바로,”

피에로는 나를 좀 애태우게 만들려는 심보인지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내가 성난 표정으로 쏘아보자 얼른 입을 열었다.

“다행히 그 통합 버전판은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그 휴대폰입니다.”

“정말이야?”

“네. 처음에 당신이 휴대폰을 구입했을 때 이 모든 것을 알려주었어야 하는데 그때 단속요원들이 갑자기 덮치는 바람에 미처 말할 틈이 없었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 시행해 보자고!”

내가 들뜬 목소리로 속삭이자 피에로는 고개를 끄떡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 휴대폰의 원형 테두리 안에 있는 바(bar)를 십계(十界)에서 ‘호구’(互俱)라고 쓰인 쪽으로 당겨요.”

“호구(互俱) 쪽으로?”

내가 의아해하자, 피에로는 내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십계(十界)’에 의해서 각각 분리되어 존재하는 당신 애인들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서죠.”

“하나로 합친다고?”

“네.”

“좋아,”

나는 깊은 내용을 몰랐지만, 한시라도 아마라가 보고 싶어서 피에로가 시키는 대로 바를 ‘호구’ 쪽으로 당기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성오가 내 앞으로 뛰어와 소리쳤다.

“잠깐,”

내가 주춤하자 곧바로 십계의 주인들이 우르르 내 앞으로 몰려왔다. 성오가 귀를 쫑긋거리며 그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지금 주인님은 우리 모두를 죽이려고 합니다.”

“뭐라고 우리를 죽인다고!”

“네. 제가 이 두 귀로 확실히 들었습니다!”

성오가 두 귀를 팔랑이며 주장하자 평소 그의 귀를 신뢰하던 다른 십계의 주인들은 깜짝 놀라며 아우성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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