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살고 싶으면 데릴사위 해
“이놈들, 그 사람 그냥 놔두지 못해!”
갑자기 그들 뒤에서 황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튀어나왔다. 백랑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왔는지 황호 내외가 노기등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예기치 않은 그들의 등장에 매우 당황하던 백랑은 얼른 얼굴색을 바꾸었다.
“아버지! 지우 일을 도와주는 중이에요! 방해하지 마세요!”
백랑이 지우를 팔아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자 흑랑과 청랑도 거기에 장단을 맞추었다.
“맞아요. 아빠, 결국 지우도 별수 없었나 봐요. 헤헤,”
“그 덕분에 서로 좋게 되었어요.”
지우 오빠들이 이구동성으로 변명하자, 청파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놈들아,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네놈들 시커먼 속을 다 알고 있어. 한동안 그 짓을 안 하는 줄 알았는데……휴, 좌우지간 그 청년 이리 내놔!”
“왜요? 엄마도 구미가 당겨요?”
청랑이 히죽대며 묻자, 청파가 도끼눈을 뜨고 청랑을 노려본다.
“무슨 헛소리야? 그 사람은 지우의 배필인데.”
“배필이요?”
청파의 폭탄선언에 무척 놀랐는지 청랑의 두 눈이 다 튀어나올 뻔했다. 그건 다른 두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파는 백랑을 밀쳐내고 유진을 일으켜 세웠다. 대신 황호가 아들들을 둘러보고 달래듯이 대답했다.
“그래. 사실 우리는 진작부터 이 청년을 지우의 짝으로 생각해 왔어.”
“에이, 농담이죠?”
아비마저 어미의 폭탄선언을 더 구체화 하자 흑랑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야. 진심이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을 우리 집에 초청한 거야.”
황호가 정색하며 명확하게 밝혔다. 그래도 흑랑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짓자 청파가 그를 쏘아보고는 맞장구쳤다.
“즉 이 사람은 우리 집의 백년손님이란 소리야.”
“백년손님이요?”
백년손님이라는 청파의 말에 한층 더 충격을 받은 듯 흑랑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청파의 예상치 않은 행동을 지켜보던 유진도 깜짝 놀랐다.
“내가 백년손님이라고?”
그가 서둘러 청파의 말을 끊으려고 하자 그녀가 얼른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러고는 아들들을 쫙 훑어보고는 쐐기를 박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우리 집 데릴사위로 삼겠다는 소리다.”
어미의 확언에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백랑이 심각한 얼굴로 딴지를 걸고 나섰다.
“사위라니요? 그건 말도 안 돼요!”
백랑의 반대에 청랑과 흑랑이 얼른 가세했다. 하지만 청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빠져! 사위는 우리 부부가 결정하는 거야!”
“세상에! 저놈이 우리 매제가 된다고? 맏이로서 전 반대예요!”
백랑이 큰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다시 반대하자 청파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딱 잘라 말했다.
“됐고! 이제 유진 저 사람은 우리 가족이 된 거야. 그 어떤 경우에도 가족끼리는 서로 해치지 않는 것이 우리 가문의 전통이야. 앞으로 너희들은 매제에게 털끝 하나 대지 않는다! 알겠지?”
청파가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백랑은 자신의 반대가 무색해졌지만 고집을 부렸다.
“난 받아들일 수 없어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청파는 백랑의 고집에 부아가 치미는 듯 그의 멱살을 부여잡고 뒤흔들었다.
“이놈의 새끼가 감히 어미에게 대들어?”
분노가 폭발하는 듯 청파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튕겼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미의 독살스러운 눈빛에 백랑은 기가 질려버린 듯 말을 더듬었다.
“엄, 엄마 말을 무, 무시하는 것이 아, 아니라 지우도 동의했느냐 궁금하다는 뜻이에요!”
“이놈아, 지우도 이미 동의했어. 걔 눈빛을 보면 몰라? 첫눈에 반했다고! 아니 저게 누구야?”
아들을 마구 윽박지르던 청파는 마침 동굴로 들어서는 지우를 발견하고는 백랑을 내팽개쳐 버렸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지우는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백랑과 겁먹은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는 오빠들을 의아한 시선으로 둘러보다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말을 더듬거리던 지우는 금방 상황을 간파한 듯 오빠들을 쏘아보며 화를 냈다.
“내 허락도 없이 절대 어둠의 동굴에서 저 사람을 꺼내다니!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지우의 질타에 지은 죄가 있는 지우 오빠들은 찍소리도 못했다. 지우는 단순한 동생이 아니라 제국의 신물을 지키는 제사장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청파가 지우 앞으로 나가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것도 모자라 저놈들이 네 애인까지 해치려는 것을 우리가 막았다.”
“애인이요?”
지우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깜짝 놀라며 제 어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청파가 아들들 몰래 그녀에게 눈을 찡긋찡긋 했다.
“아휴, 이 내숭 덩어리!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다 알고 있어. 호호,”
청파가 나름 느끼한 웃음으로 슬쩍 넘어가려고 하자, 지우는 어이없다는 듯 제 엄마를 쏘아본다.
“엄마!”
“괜찮아. 지우야, 난 요즘 네가 제사장 일을 잘하는 것보다도 연애에 눈뜬 게 더 기쁘단다. 호호,”
청파가 연신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설명하자 지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동굴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오빠들이 못 듣게 조용하지만 빠르게 속삭였다.
“엄마, 누가 연애를 한다고 그래요? 저 사람은 도둑일 뿐이에요. 난 지금 우리의 신물을 지키기 위해서 동굴에 가둬둔 거라고요. 나는 저 사람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지우의 항의에 청파는 싱긋 웃었다.
“그래. 그것 나도 잘 안다. 그래서 널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절 도와주는 거라고요?”
지우는 엄마의 해명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파는 중매쟁이와 같은 시선으로 유진을 슬쩍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을 눈앞에 두고 너의 자책감을 더 깊게 하라고 말이야.”
그 말을 툭 내뱉으며 지우를 바라보는 청파의 눈에 왠지 슬픔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책감이라면.....”
지우가 뭔가 눈치챈 듯 말끝을 흐리자 청파가 따지듯이 나지막하게 반문했다.
“넌 아직도 네 첫사랑이었던 그놈 화랑에 대해서 자책하고 있잖아?”
“엄마,”
지우는 차마 아니라고 말 못 했다. 청파가 이미 그녀의 깊은 속을 정확하게 다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엄마라는 존재의 촉은 정말 무서웠다.
화랑.
그는 지우가 아주 오래전에 만나 사귀었던 첫사랑이었다. 영혼의 만남이라고 할 만큼 두 연인은 서로 깊이 사랑했었다. 그들은 약혼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무관이었던 화랑이 영생(永生)을 사는 화성(華城) 제국에 대해서 차츰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영생이 싫어!”
그러나 그의 푸념과는 달리 지우는 정반대로 영생이 좋았다.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도 영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화랑이 화성 제국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물(神物)을 파괴하자는 반란세력에 동참했었을 때 지우는 절망하고 반발했었다. 한발 더 나아가 지우는 제국의 적호왕에게 그 음모를 신고했었다. 화랑을 살리고 그들의 사랑을 영원히 지키기 위해서.
그 바람에 반란은 실패했었고 화랑은 적호왕에게 사로잡혔다. 하지만 약속과는 달리 적호왕은 화랑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그 바람에 약혼자 화랑은 죽었고, 자신은 그 공으로 인해 화성제국의 신물(神物)을 지키는 제사장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아,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이가 죽었어.”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지우는 그날 이후 깊은 자책감에 살아왔다. 지우는 자신은 첫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영원토록 자책감이라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스스로 결심했다. 그래서 지우는 영생을 주는 신물을 필사적으로 지켜왔던 것이다. 영원히 고통받기 위해서......
“가엾은 것.”
그런 지우를 곁에서 지켜보는 황호와 청파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그들은 지우가 이제는 자책감이라는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지우는 도무지 변할 기색이 없었다.
절망적인 그때 신물을 노리는 도둑 유진이 지우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유진의 외모는 화랑을 많이 닮았다. 특히 웃을 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이 딱 닮았다.
황호와 청파 부부는 유진이 비록 도둑이라 할지라도 지우가 그와 사랑에 빠지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우가 스스로 짊어진 자책감의 형벌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지우도 보통의 처녀들처럼 사랑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했다. 그러나 지우는 유진에게 무심했다. 그가 도둑인 것을 눈치채고는 오히려 신물 지키기에만 더 집착했다.
그래서 청파는 꾀를 하나 냈다. 지우에게 화랑을 닮은 유진을 바라보며 자책감을 키우면서 살라고 일부러 그녀를 부추겼다. 그러다가 보면 어느 순간부터 지우도 유진을 좋아하리라고 여긴 것이다. 청춘남녀들은 서로 붙여 놓으면 자연히 불이 붙기 마련이니까. 그것을 위해서 유진을 데릴사위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청파는 그런 마음을 깊이 숨기고는 손가락으로 유진을 가리며 지우에게 찡긋했다.
“아마 그 자책감이라는 것도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해진 화랑보다도 화랑 그놈을 닮은 저 녀석을 네 눈앞에서 볼 때 더 커질 거야.”
“정말 그럴까요?”
“확신이 안 서면 며칠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안 그래?”
청파가 빙그레 웃으면서 지우를 꼬드기자 그녀는 고개를 끄떡이었다. 청파는 매우 기뻐하며 이번에는 유진에게 쪼르르 갔다.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발끈한 얼굴로 그녀에게 따졌다.
“내가 왜 어르신의 데릴사위가 되다니 이게 무슨 말도 소리입니까?”
“쉿! 얘들이 들어!”
유진의 항의에 청파는 깜짝 놀라며 얼른 그의 입부터 막았다.
“말이 돼!”
“네?”
“자네는 우리 지우가 받은 저주를 풀어줄 사람이니까.”
청파의 뜬금없는 저주 타령에 유진은 더욱 황당해졌다.
“저주라니 그것 또 무슨 말입니까?”
“그게,”
뭔가 말하려던 청파는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돌연 단호하게 말했다.
“말하자면 너무 길어. 지금 당장 의심 많은 저놈들에게 지금 둘이 사귄다는 증거를 저놈들에게 빨리 확실하게 보여줘.”
“어르신, 대체 뭘 보여 주라는 거죠?”
눈치 없는 유진이 자꾸 따지고 들자, 청파는 안 되겠다 싶은지 정색했다.
“당장 지우에게 키스를 해! 죽고 싶지 않으면,”
협박이나 다름없는 청파의 요구에 유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섭게 쏘아보는 지우 오빠들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는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지우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가 아무리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서 나를 속이고 동굴 속에 가둬버린 여자하고 어떻게 키스를 해?”
유진의 은근한 힐난에 지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속이다니? 내가 말한 대로 당신 몸에 다이아몬드가 생겼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동굴 속에 가두었어!”
반박하는 유진의 두 눈에 분노가 스쳐 갔다.
“그건 절차상 필요한 조치였을 뿐이에요. 의도한 게 아니에요.”
지우는 시치미를 떼고는 유진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유진은 어쨌든 결과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얻은 탓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진심이었는데 그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유진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미적대고 있자, 청파가 다가와 자신이 진짜 중매쟁이라도 되는 양 장난스럽게 웃었다.
“인제 그만 쳐다보고 좀 야한 것 좀 보여주시지. 쟤들이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는데.”
그녀의 부추김에 유진은 곧바로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우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댔다.
“어마!”
설마 했던 지우는 유진이 자기 입술에 진짜로 키스하자, 깜짝 놀란 듯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청파가 지우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지우야, 일단 유진을 꽉 붙잡아. 너의 자책감을 더 깊게 상기시켜 줄 사람이니까.”
“……”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가 제대로 키스를 해주거라. 지난번에 저 사람이 너 좋다고 꽃다발도 사 왔잖아.”
청파의 재촉에 지우는 마침내 결심한 듯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떨리는 양손으로 유진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유진도 그녀의 허리를 감고 지우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설마 하는 시선으로 지켜보던 지우 오빠들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아, 저러면 안, 안 되는데! 진짜 망했다!”
매우 당황하는 아들들과는 달리 청파는 매우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아들들을 향해 다시 쐐기를 박았다.
“잘 보았지? 이제부터 유진은 우리 집 데릴사위이고 네놈들의 매제야. 앞으로 이 사람에게 손끝 하나 대는 놈은 내가 모가지를 확 비틀어버릴 테다.”
청파의 섬찟한 경고에 청랑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 엄마 아빠가 다 된 밥에 재 뿌렸어!”
“뭐라고?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을 안 차렸어! 내 손에 죽고 싶어!”
청파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죽을 듯이 아들들에게 달려들자, 식겁한 그들은 얼른 숲 속으로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