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깡다구

깡다구 없인 인생 한방에 훅 간다

깡다구


악착같이 버티는 힘을 일컫는 속어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이혼하고 맨몸으로 아이 셋을 키우셨다. 주위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붙여준 별명이 '깡순이'였다. 당시로서는 흔한 별명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어린 자녀 셋을 혼자 힘으로 키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자녀 양육에 관한 도움도 이혼한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여느 부모처럼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다. 채소 공판장에서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책임자가 이런 얘기를 했단다.


“여기서 일하려면 손도 빨라야 하지만 깡다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채소 공판장일은 쉬워 보여도 어렵고 험한 일이다. 힘써야 할 일도 많아 근력도 남달라야 일거리가 많이 주어진다. 깡다구 없이는 힘든 일이 맞다. 그런데 어머니가 일한 지 한 달째 되던 날 채소 공판장 일거리가 많아졌다. 악착같이 일하는 모습을 본 주위 사장들이 일감을 몰아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어머니는 채소 공판장 일과 함께 생선 좌판 장사를 시작했다. 사세 확장을 한 것이다. 채소 공판장에서 일을 주던 사장의 도움으로 생선도매상에서 생선을 떼어와 팔게 된 것이다. 그러다 내가 중학교 때는 모든 장사를 마무리하고 저녁에는 항상 춤을 추셨다. 고등학교 때 무용을 전공한 어머니의 꿈은 무용가였다. 하지만 결혼과 이혼을 하면서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무용수가 아닌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곳이 어딘가?

무허가 교습소다. 기억하는가? 도롯도(트로트), 지르박, 차차차 4분의 2박자 혹은 4분의 4박자의 카바레에서 즐겨 나오는 음악에다 손을 맡겨 다양한 춤선들이 모여 있던 곳, 여기저기서 음악이 시작되면 이런 말들이 오간다.


"손 한번 잡아 주이소!"

"한 바퀴 돌까예~~"


사교춤은 당시는 뺑뺑이 춤이라 했다.

난 그때 알았다. 꿈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실현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할렐루야!


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싫었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추운 겨울날 교습소가 단속에 걸려 문을 열지 못하는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방 한 칸이 전부였던 집에서 춤을 가르쳤었다. 나와 어린 여동생은 방안 구석에서 우두커니 쳐다보곤 했다. 심지어 얼마나 자주 그런 일이 있었던지 나와 여동생은 모든 종류의 춤 스텝을 외우고 말았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까지 춤 제자로 만들었다. 나는 어머니의 제자들이 오시면 성별에 따라 손을 잡고 춤 한번 땡겨드렸다. 그런 날이면 호주머니가 두둑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때는 '블랙 댄서'라는 허슬팀을 만들어 여학교 축제 때 불려 다녔고, 대학 때 역시 '브레이킹'이라는 허슬 동아리에 들어가 맹활약했었다. 뿐만 아니라 몇 년까지 대학교 근처 클럽을 돌아다니며 나의 예쁜 춤선을 뽐내곤 했었다.


근데 지금은...... 지금은......
곧 예순을 바라보는 나인데 클럽에서 받아 줄려나? 잠시 얘기가 샜다.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사교춤은 퇴폐업으로 분류되어 단속이 심했었다. 지금은 댄스 스포츠로 주목을 받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나의 담임선생님도 어머니의 춤 제자였다. 더욱 담임선생님의 과목은 도덕선생님이셨다. 담임선생과 학부모 사이는 원래 어려운 사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다니는 학교의 3분의 1을 접수해 버렸다. 국어 선생님을 비롯해 한문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춤 제자를 나의 학교 선생으로 채웠다. 웬만한 깡다구 없이는 못 하는 일이다.


그 후 나는 중학교 3년을 어머니의 춤 제자들과 함께 학교에서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며 보냈고, 시험 점수도 은근히(?) 잘 받았다.


내가 이만큼 인생을 악착같이 버티며 살 수 있었던 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깡다구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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