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Oct 26. 2022

타인에 의한 삶

잊혀지는 두려움

모든 건 잊힌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일단 나는 기억을 잊는다.

기쁜 기억도, 슬픈 기억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잊히기 마련이다.

기쁜 기억이 사라지는 건 슬프지만, 또한 슬픈 기억이 잊히는 건 기쁘기에 망각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기억은 곧 나의 자아 그 자체이기에, 나는 매일매일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내가 죽고, 나를 기억해주는 타인이 남지 않게 되면, 그때 나는 비로소 죽는 것이겠지.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내가 나를 기억해주고 싶다. 

최대한 많은 것을 머릿속에 남길 수 있도록, 설령 머릿속에서 사라지더라도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도록.

이것이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고, 일기를 썼던 이유며,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은 나도 모르게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온 내 이야기를 짧게 해보려 한다.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 속에서 내가 했던 굵직한 행동들은 전부 타인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도하게 외모에 신경을 썼던 것도, 위대한 사람이 되어 인류사에 기록되고 싶었던 것도,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던 것도, 어릴 적, 트레이싱 기법을 이용해 그린 그림을 부모님께 보여드렸던 이유 또한, 전부 타인을 의식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타인이 나의 외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지가 두려워 우울했었고, 타인에게 잊히는 것이 싫어 막연히 위대해지고 싶었을 수도 있다. 운동 또한, 진정으로 운동을 사랑해서 이걸 직업으로 삼고 싶었다거나 하는 순수한 마음이 아닌, 그저 어떻게든 유명해져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름 예술가인척 으스댔지만, 내게 정말 '예술혼'같은 게 존재했다면 트레이싱을 해서 얻은 결과물로 칭찬을 받고 뿌듯함을 느끼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예술가에게 트레이싱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하나, 정말 아이러니 한 점이 있다. 내가 만약 재능이 있어 저 중 한 개에서라도 성공했다면, 이 성공이 타인을 위한 것이었을지 아닐지는 안중에도 없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나는 트레이싱을 하며 정말 스스로가 예술에 애정을 느끼고 있다고 믿었고, 결국 트레이싱이 필요 없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내가 예술로 성공했다면, 그건 가짜 성공이었을까? 남을 의식하여 정한 목표는 가짜 목표인가?


    지금 내가 내 과거의 도전들을 '가짜'였다며 단정 지으려 하지만, 여전히 저때와 큰 맥락에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미래에 성공한 후 지금 써놓은 글을 본다면,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 치겠지. 정말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애초에 이런 류의 질문에 명료한 정답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만약 그런 게 있다 한들, 겨우 19년 살아오며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로 이루어진 나의 좁은 스펙트럼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  이를테면 '남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옳은 행위인지 아닌지. 같은 것 말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들 같은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다른 세상을 본다.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또 어떤 것을 보고 들었느냐에 따라서 모두는 다른 색안경을 착용한다.

또한 내가 아는 단 한 가지 정답은, 우리의 색안경을 변화시키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항상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려 노력한다. 비록 오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한 글을 썼지만, 쓰면서도 의심을 멈추지 않았기에 의문문으로 글을 작성했다. 딱 이 정도 희망은 가지며 살아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유학 일기 2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