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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먹는 고양이

어른이 된다는 건

by 피터팬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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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용한 밤이었어요.
창문 밖으론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았고,
방 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그런데 이상했어요.
창밖에,
처음 보는 골목이 생겨 있었어요.


처음 보는 길인데,
왠지 마음 한쪽이 두근거렸어요.


‘이상하다... 저 골목, 어디서 봤지?’


나는 조심조심 창문을 열고,
달빛을 따라 밖으로 내려갔어요.


골목 입구에는
조용한 벽돌들과
빛바랜 공깃돌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어요.


담벼락엔
어릴 적 내가 그려둔 별 하나가
기울어진 채 남아 있었고,


그 옆엔
‘나’라는 글씨가 아직도 그대로였죠.


그때였어요.
나무 그림자 아래서,
무언가가 살짝 다가와 말했어요.


“오랜만이야. 너, 우리를 기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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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끝에는
조용한 숲이 있었어요.


햇살도, 바람도,
숨을 죽인 것처럼
고요했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 숲 안으로 발을 디뎠어요.


그런데 발밑엔 나뭇잎 대신
작은 종이들이 잔뜩 깔려 있었어요.


그 종이들 위엔
낯익은 글들이 적혀 있었어요.


“괜찮다고 했지만, 진짜는 아니었어.”
“그때 나는 많이 외로웠어.”
“울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 했지...”


아...
이건 내가
오랫동안 마음 깊숙이 숨겨 두었던 말들이었어요.


나는 큰 나무 하나에 손을 댔어요.
그러자 나무가 살짝 떨리더니,
작은 목소리가 들렸어요.


“너, 나를 기억하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예전에 이 나무 아래에서
혼자 울었던 밤이 생각났거든요.


그 순간,
숲속 어딘가에서
작은 빛 하나가 반짝였어요.

그건 오래전


내가 나에게 건네지 못한
작은 위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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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지나니
낡은 시계탑이 하나 나왔어요.


시곗바늘은
‘10시 10분’에서 멈춰 있었어요.


나는 조심히 시계탑 안으로 들어갔어요.
안은 깜깜했고,
숨소리조차 조용했어요.


가장 높은 계단 끝에는
누군가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어요.


작은 어깨,
헝클어진 머리카락,
헐렁한 노란 티셔츠.


나는 살며시 다가가서 물었어요.


“저기... 너는 누구야?”


그 아이는 천천히 돌아보며 대답했어요.


“나는... 너였던 아이야.”


“...왜 여기 있었어?”


“너한테 잊혀졌거든.

그래서 시간이 멈춰버렸어.”


그 말이 끝나자
시계에서 ‘딱’ 하고 소리가 났고,
멈춰 있던 바늘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잡았어요.
작고 따뜻한 손이었어요.


그렇게,

나는 잊고 지냈던 나를
조금씩 다시 기억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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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탑을 나서자
숲 한가운데에 호수가 있었어요.


물은 유리처럼 맑고 고요했죠.


나는 조심스럽게
물가에 다가가 몸을 숙였어요.


물속에는,
내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내가 아니라,
어릴 적 나였어요.


잘 웃고,
말하지 않아도 다정했던
그때의 나.


나는 조용히 물었어요.


“잘 지냈어?”

물속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기다렸어.
언젠가는 네가 다시 와줄 줄 알았어.”


나는 고개를 숙였어요.


“미안해.
너를 잊은 줄도 몰랐어.
어른이 되느라 바빴거든.”


아이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어요.


“괜찮아.
이제 날 데려가 줘.”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고,
두 손이 천천히 맞닿았어요.


그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따뜻한 기운이 피어났어요.


그건,
어릴 적 내 안에 살던
순하고 고운 마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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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를 지나니
작은 문 하나가 있었어요.


문 위엔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잃어버린 시간의 방.”


그 안엔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들어 있었어요.


고양이는 눈을 살짝 뜨더니 말했어요.


“또 왔구나.”


“또...?”


“넌 여기 여러 번 왔었어.
항상 뭔가를 찾다가 그냥 돌아갔지.”


방 안엔
멈춰 버린 시계들이 가득했어요.


“이건 네가 흘려보낸 시간들이야.
말하지 못한 오후,
웃지 못한 하루.”


나는 조용히 물었어요.


“다시 되돌릴 수는 없을까?”


고양이는 고개를 저으며
아주 작은 시계 하나를 건넸어요.


“이건 아직 먹지 않은 시간이야.
어떻게 쓸지는... 너한테 달렸어.”


나는 그 시계를
두 손으로 소중히 감쌌어요.


그건 분명히,
지금의 따뜻함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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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
문 하나가 조용히 서 있었어요.


아무 장식도,
이름도 없는 문.


그런데 왠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문 같았어요.


나는 문 앞에 섰어요.
한 손에는 작아진 나의 손길,
다른 손에는 따뜻한 시간을 쥐고 있었죠.


문을 여는 순간,
빛이 흘러나왔어요.


그건 햇빛도, 불빛도 아닌
이해의 빛이었어요.


그 빛을 따라 문을 넘자
익숙한 방이 펼쳐졌어요.


창밖은 여전히 밤이었고,
시계는 새벽 3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그런데,
방 안의 공기는 조금 달랐어요.


나는 책상 위에
작은 시계를 올려두고
조용히 손을 얹었어요.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어요.


어른이 된다는 건,
모든 걸 잊는 게 아니라


잊었던 나를
다시 안아주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았어요.




그날밤,
나는 나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조용히 살아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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