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되찾는 여름
여름이 오면 소녀는 조용해졌다.
햇살은 부드럽고 바다는 반짝였지만,
소녀의 마음에는 말 없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기울 무렵, 아주 오래된 바람이 찾아온다는 이야기.
그 바람은 누군가의 기억을 품고 있어,
아무 말 없이도 마음속에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다섯 살의 어느 저녁,
소녀는 그 바람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내 슬픔을 가져가 줘. 너무 무거워서 안고 있을 수가 없어.”
그날 이후,
소녀의 마음은 이상할 만큼 가벼워졌다.
넘어져도 아프지 않았고, 혼이 나도 억울하지 않았다.
웃어야 할 순간엔 웃는 흉내를 냈고,
슬퍼야 할 순간에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람은,
늘 그녀 곁에 있었다.
잠들기 전, 커튼이 살짝 흔들리는 밤이면
바람은 조용히 속삭였다.
“이젠 괜찮아. 네 마음, 내가 데려갔으니까.”
사람들은 그녀를 말 잘 듣는 아이, 착한 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소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투명해지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연한 빛으로 바래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 날,
바람이 다시 찾아와 말했다.
“넌 이제 아무것도 느끼지 않겠지. 그게 네가 원한 거였잖아.”
소녀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가슴이 저릿해졌다.
너무 늦게 알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평온은, 고요한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날 밤, 소녀는 바람이 시작되는 능선을 올랐다.
그곳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머리칼이 흔들리고, 마음이 조금 떨렸다.
소녀는 작게,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돌려줘. 다시 느끼고 싶어.
아파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누군가를 좋아하고,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싶어.”
세상이 숨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풀벌레도, 나무도, 달빛도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바람이 불었다.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바람에는 따뜻한 체온 같은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날 밤, 소녀는 울었다.
소리 없이, 오래도록.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마음 어딘가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살며시 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꿈을 꿨다.
그 꿈 속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아주 오래전, 처음 불렸던 그 이름으로.
눈을 떴을 때,
소녀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법도, 웃는 마음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여름은 다시 오고,
바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엔 이제,
잃어버린 마음 대신,
소녀의 목소리가 함께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