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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돌아간 고래

내가 잊지 않은 존재

by 피터팬


어릴 때,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누가 나를 특별히 미워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도 나를 오래 바라보진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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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늘 방파제에 혼자 앉아 있었죠.

학교 끝나고, 비 오는 날에도.

그냥, 그 자리가

조용해서 좋았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바닷물이 천천히 갈라지듯

고래 한 마리가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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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을 만큼 큰 몸,

깊고도 느린 눈동자.


나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고래를 바라봤고,

고래도 조용히

나를 보고 있었어요.


그 날 이후,

고래는 자주 왔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옆에 있어줬어요.


그 조용한 시간이,

내가 하루 중 가장 덜 외로웠던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그땐 몰랐어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그게 나를 얼마나

버티게 해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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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흘렀고

나는 도시로 떠났고

어른이 됐어요.


아무도 묻지 않았어요.

“잘 지냈어?”

“요즘 마음은 어때?”

그저 바쁘고, 말 줄이고,

감정은 가끔 잊고.


어느 날 문득,

그 바다가 떠올랐어요.

그 자리, 그 고래,

그 조용했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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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오랜만에

다시 바닷가로 갔어요.

방파제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물만 바라보았죠.


그리고,

고래가

정말로 다시 나타났어요.


멀리서,

천천히,

아주 조용히.


나는 그 앞에서

갑자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아무것도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먼저 알아보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고래에게

그때 못 했던 말을 꺼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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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그때 거기 있어줘서.”


그날 이후로

나는 자주 바다를 보러 가요.

고래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괜찮아요.


그 존재가 한때

나를 잊지 않고 바라봐줬다는 것.

그걸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잊힌 줄 알았던 바다는 언젠가 나를 다시 불렀고,
나는 대답하듯 그곳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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