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뿌에르또 끼또: 카카오 농장 - 2015/07/24(금)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 농장 투어를 간다니 아이들의 반응이 뜨겁다.
1박 2일 일정이므로 큰 짐은 민박집에 두고 이틀 치 짐만 챙겨 버스 터미널(Terminal Carcelen)로 향했다.
카카오 농장이 있는 뿌에르또 끼또(Puerto Quito)까지는 3시간 30분 거리인데 처음엔 텅 비었던 버스가 여러 정류장을 거치며 점점 자리가 들어차더니 급기야 제나를 무릎에 앉히고 가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제나 자리로 티켓 하나를 더 살 걸 하고 뒤늦게 후회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혼자 앉기에도 비좁은 자리에 제나까지 무릎에 앉히고 가려니 불편을 넘어 다리가 마비될 정도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바깥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커녕 불편해하는 제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3시간을 버텨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산 기후의 끼또와 달리 열대기후인 뿌에르또 끼또는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나고 온몸이 끈적였다. 버스가 내린 곳으로 픽업을 오겠다던 차는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 가까이 늦게 도착했고 덕분에 우리는 대책 없이 버스정류장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더위와 습기로 서서히 지쳐갔다.
그렇게 도착한 카카오 농장에는 유일한 영어 구사자인 농장 주인이 단체 방문객을 픽업하러 가서 없었고 그 집의 안주인과 맨발의 육 남매가 수줍게 우리를 맞이했다. 육 남매는 젊은 엄마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뚝딱 우리의 점심식사를 준비해 내놨고 곧이어 농장을 누비면서 온갖 열대 과일의 따주며 농장을 구경시켜줬다. 오렌지만 해도 대여섯 종류가 넘었고 레몬과 선인장 열매 등도 종류가 다양했다. 육 남매의 둘째인 열일곱 살 에릭은 맨발로 나무에 올라가 낫으로 쉽게 열매를 따서 아래로 던져주었다. 여섯 살 제나(여기 나이로 네 살) 보다 두 살 많은 육 남매의 다섯째 딸 마리아는 모든 게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나에게 뒷면에 흰 가루가 잔뜩 묻은 풀을 뜯어 풀 도장을 찍어주고 꽃을 따주기도 하고 아기 토끼도 안겨주며 말없이 다정하게 친근함을 표했다.
이 농장의 주인공인 카카오는 울퉁불퉁 쭈글쭈글한 럭비공 모양에 붉은 자줏빛이다. 갓 자란 열매는 초록색이었다가 노란색으로 변하고 다 익으면 붉은 자줏빛이 된다고 했다. 에릭은 능숙한 칼 솜씨로 카카오를 잘라내서 그 속의 하얀 과육을 맛보라며 건네주었다. 하얗고 미끌미끌하고 달콤한 과육 속에는 단단한 씨앗이 있었는데 그 씨앗이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란다. 커피처럼 콩 열매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외의 모습이다.
농장 투어를 마치자 육 남매는 우리들을 데리고 근처 개울로 데려갔다. 제법 물살이 센 개울에서 물고기처럼 헤엄치며 서로에게 매달려 장난치며 자유롭게 노는 농장 아이들에 반해 나름 수영을 잘하는 형주도 물살에 휩쓸려 중심을 잃었고 물을 무서워하는 제나는 얕은 물에서 조약돌을 던지며 소심하게 놀았다. 자연에서 자란 육 남매의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을 보자니 도시에서 보호라는 명목 아래 온갖 제약을 받으며 허약하게 자란 우리 아이들이 가엽게 느껴졌다.
해질 무렵 차가워진 물에서 나온 육 남매의 둘째 아들 에릭과 형주는 개울가에 나란히 서서 조약돌을 집어 들고 누가 더 멀리 던지나 시합을 하기 시작했다. 형주보다 두 살 위인 에릭은 형주보다 체격이 작았지만 체력은 형주보다 월등히 앞섰다. 에릭의 조약돌은 개울 건너편으로 훌쩍 넘어가는데 형주는 아무리 애를 써도 건너편까지 미치지 못했다. 묘한 경쟁심에 사로잡힌 형주가 형을 이겨보겠다고 종목을 물수제비로 바꿨으나 얕게 스무 번을 넘게 튕겨 날아가는 에릭의 물수제비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석양이 지는 개울가에 나란히 서서 서로를 곁눈으로 의식하며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번갈아가며 말없이 돌팔매질을 하는 두 남자아이들의 풍경이 참 예쁘다.
어느덧 사위가 어두워지고 농장에 드문드문 불이 켜졌다. 육 남매의 엄마와 육 남매 중 손위 아이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 아이들은 육 남매의 어린 동생들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울려 놀았고 나는 물놀이 후 벗어둔 아이들의 옷을 빨아 마당의 빨랫줄에 널었다. 뒤늦게 다른 방문객들을 데리고 농장에 도착한 육 남매의 아버지는 온 가족을 진두지휘하며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곧이어 소박한 저녁 식사가 차려지고 농장 식구들과 방문객들이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귀에 익은 흥겨운 음악이 흐르고 전깃줄에 매달린 전구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다소 낭만적인 시간이 10분쯤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칠흑 같은 어둠이 농장을 덮쳤다. 이런 완벽한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남매는 손을 뻗어 더듬으며 내 곁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육 남매는 어느새 양초와 성냥을 찾아와 각 테이블마다 불을 밝혔고, 육 남매의 아빠는 정전 덕분에 더 낭만적인 초콜릿 만들기 체험을 하게 되었다며 둥글둥글한 얼굴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진한 자줏빛으로 잘 익은 카카오 열매의 과육을 제거하고 그 안의 씨앗을 햇볕에 말린 후 팬에 볶아서 씨앗의 껍질을 까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카카오 씨앗들을 톱니바퀴가 달린 작은 기계에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기름기를 머금은 찐득한 카카오 반죽이 나온다. 이 100 퍼센트 카카오에 우유 성분의 액체를 얼마나 넣고 끓이느냐에 따라 초콜릿의 맛이 결정된다. 육 남매의 가운데 서열인 아이들은 우리 테이블에 함께 앉아 기특하게도 아버지를 도와 초콜릿을 만드는 전 과정에 일손을 보탰다. 우리 트리오는 즉석에서 만든 초콜릿을 연신 손가락으로 찍어먹으며 달콤한 저녁시간을 보냈다.
저녁 일정이 끝난 후 우리에게 배정된 바깥채에 들어가니 허름한 방에 푹 꺼진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낡은 이불에 모기가 득실대는 방에서도 아이들은 금세 잠이 들었다. 험한 잠자리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홀로 이런저런 생각에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닭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잠깐 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