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끼또: 과야사민 미술관 - 2015/07/28(화)
이틀 묵을 작은 짐만 가져왔지만 방 여기저기에 널린 짐과 그간 빨았던 옷들을 배낭에 챙겨 넣자니 이동하는 날의 아침은 역시나 분주하다.
아침 6시 40분 버스를 타고 끼또에 도착하니 10시였다. 바로 대사관으로 가서 한국에서 재발급되어 보내진 여권을 찾았다. 이로써 페루 리마에서의 가방 도난 사건이 자그마치 24일이 걸려서 일단락되었다. 그동안 여권 때문에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마음 써 주었던 고맙고 정겨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여러모로 애써준 페루 리마의 대사관 박난영 사무관, 크루즈 델 수르의 버스터미널의 안전요원 아저씨, 다소 버벅 대긴 했지만 한 밤중에 도난 서류 작성하느라 고생했던 경찰서의 여성 경관, 리마의 호스텔 관리인 아저씨, 에콰도르 과야낄의 호스텔 관리인 아가씨와 끼또의 민박집주인 부부 내외, 그리고 볼리비아에서의 인연으로 페루에서 다시 만났던 미국 청년 이안까지...
"모두 모두 고마웠어요. 당신들과의 소중한 인연과 따듯했던 마음, 잊지 않을게요."
새 여권을 가방 깊숙한 곳에 고이고이 잘 챙겨 넣고 대사관에서 멀지 않은 과야사민 미술관으로 향했다.
과야사민(Guayasamin 1919~1999)은 에콰도르 출신의 의식 있는 화가로 남미의 핍박받는 인디오들과 역사적으로 침략자에게 착취당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 존경받는 인물이다. 가난한 인디오의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적인 미술교육도 받지 못했던 그는 다행히도 30대 초반에 미국 화단의 주목을 받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의 반열에 올라 50년 가까이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혼을 펼칠 수 있었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에서 가난과 속박, 핍박으로부터 자유롭로자 하는 사람들의 갈망과, 사랑과 모정 같은 따듯한 감정조차도 강렬하게 그려낸 그의 뜨거운 작품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에콰도르 사람들의 불평등한 삶에서 시작한 그의 관심사는 남미 전체로 확장되었고 이내 전 세계에 만연한 불평등과 전쟁으로 고통받은 민중에게로 까지 확장되었다고 한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 하나하나가 너무도 강렬해서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는데, 여러 작품들 중에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은 미술관 중앙에 돔 형식으로 만들어진 천장을 캔버스 삼아 그려진 볼리비아 뽀또시의 은 광산에서 착취당했던 인디오들의 노동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우리가 그 도시에 가서 그들의 아픈 역사에 대해 눈으로 보고 느꼈기 때문에 그 고통과 절망과 자유에의 희구가 더 절절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1층 출구 앞에 연작의 형식으로 전시된 여러 인종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얼굴을 그린 작품들 앞에서는 그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자신들의 슬픈 삶에 대해 내게 말을 건네 오는 듯하여 발걸음을 옮겨놓기가 어려울 만큼 화폭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이 생생하고 강렬했다.
미술관 관람이 끝나고 미술관의 바로 위에 위치한,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살았던 집을 둘러봤다. 그의 작업실에는 그가 그렸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과야사민이 그 초상화를 그려 완성해가는 과정을 담은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초상화 속의 주인공은 스페인의 어느 유명한 기타리스트였다고 한다. 화가는 밑그림 없이 유화를 섞는 인두로 20여 분만에 모델의 윤곽을 잡고 공간을 채워가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대상이 가지는 작은 느낌을 끄집어내서 큰 특징으로 만들어 강렬하고도 즉흥적으로 표현해 내는 그의 능력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과야사민은 에콰도르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고국의 민속품과 고미술품들을 상당히 많이 수집했다고 한다. 그는 그 수집품들과 그의 작품들이 다른 나라로 흘러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아서 자비로 그 모든 것들을 전시할 넓은 미술관을 짓고 그 안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전시한 후 나라에 귀속시켰다고 한다. 끼또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언덕에 지어진 그의 집 마당 벤치에 앉아 끼또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조국과 남미, 그리고 세상의 모든 핍박받는 사람들의 삶을 연민했던 늙은 화가의 따스한 마음이 내게로 스며드는 듯했다. 가치 있는 삶을 살다 간 그를 만나서 나와 아이들의 하루가 더 값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