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센트로 외 - 2015/05/05(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메트로는 ‘숩떼(Subte)’라고 불린다. 숩떼 A라인은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노선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열차 칸에 주황색 백열등을 달고 달린다. 커브 구간을 돌 때마다 삐그덕 소리를 내는 옛날식 열차를 타고 센뜨로로 향했다.
의회 광장
숩떼 A라인 꽁그레소(Congreso)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의회 광장이다. 첫 의회의 구성과 독립선언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광장에는 작은 분수대 주변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간식을 먹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늘 이익단체들의 대형 깃발과 팻말과 구호가 난무하는 우리네 국회의사당 앞 풍경과 다른 모습이다. 이 고요함은 정치적 안정에 기인하는 것일까, 정치적 압박에 기인하는 것일까.
대성당
의회 광장에서 길을 건너면 바로 대성당이다. 여러 개의 흰 대리석 기둥들과 그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옆으로 긴 모양의 삼각형 모양에 새겨진 측면 부조의 모습은 이 건물이 법원이나 박물관일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근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온통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외부와 달리 성당의 내부는 목조와 결이 보이는 투명하고 고급스러운 대리석으로 장식되었다. 마호가니 톤의 실내 장식과 조명은 내부까지 새하얀 브라질 상파울루의 대성당보다 따듯하지만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런 엄숙한 분위기 속에 낮게 울리는 성가 합창곡이 더해져서 성스럽고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시립동물원
대성당에서 나와 숩떼를 타고 시립동물원으로 향했다.
한국과 달리 동물들을 풀어놓고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이 좋아할 거라는 숙소 할머니의 권유로 방문했는데 입장료가 만만치 않았다. 일부 유순한 동물들을 관람객들이 다니는 길에 풀어놓고 키우고 있었고 사육되고 있는 동물의 우리가 꽤 넓다는 점, 남미에 사는 동물들이 많다는 점, 그리고 초식 동물들에게 먹이를 줄 수 있다는 점 정도가 우리네 동물원과 다를 뿐 도심 속 동물원의 모습은 우리네의 그것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기대보다 다소 실망스러웠던 동물원에서 나와 숩떼를 타고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왔다.
탱고 쇼
돌아오는 길에, 보에도 역 바로 앞에 있는 땅고 쇼 안내문이 걸린 레스토랑(Esquina Homero Manzi)이 눈에 띄어서 숙소 할머니께 여쭤보았더니 이 동네에서 꽤 유명한 땅고 쇼를 하는 곳이라고 하셨다. 대부분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쇼를 감상한다고 했는데, 레스토랑의 식사 값이 상당히 비싸니 저녁식사를 숙소에서 하고 레스토랑에서 술 한두 잔 주문하면 싼 값에 쇼를 볼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우리는 할머니의 팁에 따라 숙소에서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배낭에서 그나마 제일 점잖은 옷으로 꺼내 입고 기대감에 부풀어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레스토랑의 내부는 훨씬 넓었다. 테이블마다 영화배우처럼 등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과 멋진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식사 중 와인 잔을 부딪치고 있었고, 풍성한 흰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멋스럽게 멜빵을 멘 웨이터들이 매너와 자부심이 넘치는 태도로 테이블과 주방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을 담당한 웨이터는 작은 키에 미소 가득한 얼굴을 가진 50대쯤으로 보이는 분이었는데 다른 손님들에 비해 볼품없는 옷차림에 아이들까지 거느리고 나타난 우리 트리오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을 텐데도 아이스크림 하나와 칵테일 한 잔뿐인 우리의 초라한 주문을 받아 기쁜 얼굴로 주방에 전달했다. 이윽고 과자와 과일로 한껏 멋을 부린 아이스크림과 칵테일이 날렵한 동작으로 테이블 위에 놓이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웨이터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곧이어 쇼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춤을 기대하고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탱고라고 하면 마치 무조건 반사처럼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젊은 여인과 추던 그 격정적이고 애절한 ‘춤’을 떠올리게 되므로. 그러나 춤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기대는 압도적인 탱고 음악에 묻혔다. 캄캄했던 무대에 네 개의 작은 조명이 켜지고 그 조명은 각각 피아노와 첼로, 기타, 반도네온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 네 악기의 앙상블로 시작된 땅고 음악은 우리의 오감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연주되면서 남녀 댄서들이 우아한 옷을 입고 무대에 등장해 춤을 추기 시작했지만 우리의 관심은 온통 댄서들 뒤에서 탱고를 연주하는 연주가들의 음악에게로 향했다.
두 번째 곡이 끝나자 댄서들이 무대에서 뒤로 사라지고 다시 연주자들만 남았다. 세 번째 곡은 한 곡조 안에 네 개의 악기들이 돌아가면서 각의 파트를 주연으로 연주하는 구성의 곡이었다. 그 첫 번째 주연은 피아노.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피아노가 그렇게 강렬한 소리를 내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연주에 몰입한 피아니스트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며 손가락으로 건반을 내리찍듯 연주를 하다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내 일어서서 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었다가 건반을 내리찍으며 연주했다. 강렬함이라는 면에서 기타도 피아노에 못지않았다. 어쿠스틱 기타의 그 짧은 현과 작은 울림통이 어떻게 이렇게 긴박감이 넘치고 강렬하면서도 때로는 숨이 끊길 듯 애절한 소리를 다 품을 수 있는 것일까. 낮고 무게감 있는 울림으로 깊은 애절함을 표현하는 첼로와, 탱고를 완성하는 애절함의 결정판 반도네온, 그 하나하나가 모두 탱고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저 대도시가 가진 광장과 대성당, 고층건물과 동물원, 그런 것만이 이 도시의 전부였다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자신만의 색깔도 매력도 흐릿한 흔한 대도시 그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강력한 마력(魔力)을 지닌 탱고가 있어서 자신만의 페로몬을 발산하는 생동감 넘치는 도시가 되었다.
음악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나는 늦은 시간이라서 아이스크림만 먹고 잠이든 제나를 품에 안고 공연 초반부터 내내 공연을 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웨이터가 옆 테이블에 양해를 구하고는 빈 의자를 모아서 이어 붙여 제나를 눕히도록 하더니 주방에서 새 테이블 시트를 여러 장 가지고 와서 제나 목에 받쳐주고 이불 삼아 덮어 주기까지 했다. 자신의 직업과 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태도는 그 자신과 이 도시를 더 빛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