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잡아라."

인천 공항 표류기 - 2015/04/16(수)

by 민경화

게으름은 분명 병인 게 분명하다.

급히 떠나는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짐 준비를 미루다가 출국하는 날 새벽까지도 배낭 싸기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열여섯 살 형주가 짊어질 50리터 배낭 하나, 내가 지고 다닐 65리터 배낭 하나, 그리고 휴대용 작은 배낭 두 개 안에, 한꺼번에 사계절을 다 가지고 있는 남미에서 여섯 살 제나를 포함한 우리 셋이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사용할 살림살이를 빠짐없이 채워 넣는 것은 어쩌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리스트를 보며 물건들을 넣었다 빼기를 수 차례 반복하다가 집을 나서야 하는 시간에 이르러서야 배낭 커버를 덮었다.

내가 제일 큰 배낭을 뒤로 메고, 휴대용 손가방을 어깨에 대각선으로 둘러메고, 왼손에 휴대용 유모차를 접어서 끌고, 오른손으로 제나 손을 잡았다. 중간 크기의 배낭과 가장 작은 배낭은 형주가 앞뒤로 멨다. 이렇게 여행의 대오( 隊伍)가 갖춰졌다.

어린 제나가 특히 걱정되어 공항까지 배웅 나오셨던 시어머니께 걱정하지 마시라고, 조심히 잘 다녀오겠노라고 씩씩하게 인사드리고 나서 간신히 배낭을 짊어지고 뒤뚱뒤뚱 공항으로 들어섰다. 짐 무게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철부지 며느리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험한 곳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고 아이들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셨던 그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스러우셨을까마는 어머니는 끝까지 웃는 얼굴로 손 흔들며 우리를 응원해주셨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나니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 여유롭게 환전을 하고 나서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보험회사 창구로 향했다. 대기자 줄이 길기에 창구에 우리 탑승시간을 알려주고 그 시간 안에 업무처리가 가능하냐고 물으니 일단 기다리라고 했다. 지루해하는 아이들과 장난치며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우리 순서가 돌아오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에 다시 창구에 확인을 하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해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 탑승시간을 30분 남겨둔 상황에서야 우리 순서가 됐다. 서둘러 가입해달라고 하니 우리의 여행지들이 대부분 위험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가입하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 있다며 자꾸만 시간을 끌었다.

이제 탑승시간을 15분 남겨둔 상황인데도 회사의 승인만 나면 된다며 우리를 더 잡아두려는 보험사 직원에게 다 취소하라고 외치고는 제나를 들쳐 안고 출국장을 향해 뛰었다. 출국장 검사와 보안검사, 출국심사 모두 다행히 줄이 길지 않아서 평소보다 빨리 통과할 수 있었는데, 하필 우리가 타야 할 비행기의 탑승구는 우리가 통과한 출국심사대의 정반대 편에 위치해 있었다. 세계 최고의 시설을 갖춘 자랑스러운 인천공항의 거대한 규모를 원망하며 제나를 안은 팔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숨이 목까지 차오르도록 절박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형주야, 뛰어! 먼저 가서 비행기 잡아!"

출국심사대에서 여권을 낚아채듯 들고는 나를 앞서 뛰어가는 아들의 뒤통수에 대고 절규하자, 우리를 발견한 항공사 직원이 무전기로 비행기에 연락하며 우리와 함께 뛰었다. 화려한 면세점이 즐비한 공항 복도에서는 조선시대 관복 차림을 한 병사들이 열을 맞춰 걸으며 나팔을 부는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행진과 연주가 마치 영화 속의 슬로모션처럼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대입 체력장에서도 이렇게 목숨 걸고 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비행기에 올랐고, 우리의 남미 여행은 그렇게 난리법석을 피우며 시작되었다. 여행자보험도 가입하지 못한 채로.

20150416_134712[1].jpg 인천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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