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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화 Dec 27. 2017

여권 도난 사건

페루, 이까에서 리마로 이동 - 2015/07/04(토)

작은 오아시스 마을인 와까치나에는 시장이 없어서 이까로 시장 나들이를 다녀왔다. 

이까로 가는 길에 잡아탄 택시의 젊은 기사와 나란히 앞에 앉은 형주는 몇 개 안 되는 에스파뇰 단어를 요리조리 조합해서 제법 대화를 이어갔다. 어디서 왔는지, 어떤 경로로 여행하고 있는지, 누구와 여행하고 있는지,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등. 녀석의 현지 적응력이 점점 업그레이드되고 있음에 내심 놀랐다.

이까의 중앙광장에 내려서 어제 버기 투어에서 잃어버린 제나의 선글라스를 사고 시장 어귀의 길거리 음식점에서 생선구이 요리를 주문해 먹었다. 다시 광장 근처로 돌아와 설탕물을 잔뜩 묻힌 과자와 작은 봉지에 담긴 과일을 사서 먹으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이까의 시장 거리를 쏘다녔다. 도로에는 한국산 중고 경차들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그중 가장 반가웠던 것은 지금은 한국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는 초소형 자동차 티코가 페루의 도로에서 여전히 씽씽 달리고 있는 기특한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와까치나로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운전하시는 삼발이를 잡아탔다. 자전거보다 빠르고 자동차보다는 느린 삼발이의 달달 거림이 마냥 재미있어서 아이들은 자꾸만 까르르 웃었다. 내내 경직된 표정으로 앞만 응시하던 운전사 할아버지는 룸미러로 힐끗 아이들을 쳐다보시다가 이내 얼굴에 살짝 미소를 걸었다.

우리는 오후 버스를 타고 리마로 향했다.

이까 시내 풍경. 시장통의 좁은 도로는 삼발이가 차지하고 있다.
음식사진과 메뉴가 함께 있는 식당 간판. 우린 이런 식당을 사랑한다.
삼발이 타고 와까치나로 돌아가는 길
와까치나의 오아시스


리마의 크루즈 델 수르(Cruz del Sur: 남미의 대표적인 장거리 버스회사)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 30분. 비몽사몽 버스에서 내려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잠투정하는 제나를 안은 채 형주와 리마에서 머물 숙소를 상의하고 있었던 건 불과 3여분 정도였다. 그 잠깐 사이에 옆자리에 두었던 손가방이 사라졌다! 가방이 있어야 할 저리에 없음을 깨닫고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합실이 쩌렁쩌렁 울리게 외쳤다.

“My bag! My bag! Somebody took my bag!”

그 손가방 안에는 약간의 현금과 신용카드, 지난 2개월간 여행하면서 적어왔던 여행기가 담긴 수첩,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여권이 들어있었다. 건물 관제실에서 CCTV로 확인해보니 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합실에서 대담하게도 우리 가방을 훔쳐간 사람들은 남녀 2인조 도둑이었다. 혹시 현금만 빼내고 근처 휴지통에 버렸을까 싶어서 건물 내부와 외부의 휴지통을 모두 뒤져봤지만 허사였다. 터미널 경비 직원은 자기들도 나름대로 찾아보도록 애써 볼 테니 우선 경찰에 도난 신고를 하고 대사관에 가서 여권 재발급 신청을 하라며 경찰서 행 택시를 잡아줬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그 경비 직원의 신분증을 사진을 찍고 그의 연락처를 메모한 후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로 가는 길에 급히 신용카드 회사 두 곳에 분실 신고를 하고 페루의 한국 대사관에 연락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문의하자 일단 경찰서에 가서 도난신고 확인서를 받아서 여권사본을 가지고 다음날 대사관으로 오라고 했다.

경찰서에는 더듬거리며 영어를 하는 여성 경관이 야간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기라도 하듯이 당시의 상황을 반복해서 계속 물어봤다. 두 시간 넘게 걸려 작성된 분실물 도난신고 확인서를 받아 들고 경찰서를 나섰다.

우리 셋의 상처받은 영혼은 이제 편의시설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이 가장 믿음직한 숙소를 원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은 론니 플래닛이 가장 칭찬한 리마의 숙소 피르와 호스텔(Pirwa Backpacker’s Hostel)이었다. 주택가에 위치한 호스텔의 문을 열고 들어간 건 밤 10시 반를 넘긴 시각이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늦은 시간에 아이 둘을 데리고 호스텔에 들어서자 호스텔 관리인은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가,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자 더 당황한 기색이 되었다. 

프라이빗 룸은 내일이나 돼야 여유가 생기니 오늘 밤은 도미토리에서 자야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잠자리를 얻어 입고 온 옷 그대로 2층 침대에 몸을 뉘었다. 여권 가방을 도난당한 충격에다 낯선 사람들의 지독한 발 냄새와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 문을 여닫으며 밤늦도록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소리가 난무한 도미토리의 분위기 속에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든 제나를 꼭 껴안고 날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리마에서의 첫 번째 밤이다.

장거리 버스 크루즈 델 수르
리마에서 머물었던 피르와 호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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