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리마 - 2015/07/05(일)
일요일이라 대사관에 갈 수 없었다. 그러니 오늘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가장 급한 일은 임시여권 용 사진을 찍는 것이다. 호스텔 관리인의 말로는 일요일이라서 문을 연 사진관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다급한 마음에 케니 공원(Keney parque)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문구점과 겸업하는 사진관을 찾아냈다. 점원은 오늘 찍은 사진이 내일이나 돼야 나온다고 했다. 우리 사정을 설명하고 돈을 좀 더 내더라도 오늘 안으로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더니, 그럼 문을 닫는 시간까지 준비해 보겠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다.
저녁까지 시간을 때워야 하는 우리 앞에 미장원이 나타났다. 여행하기 전부터 머리를 깎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형주의 머리는 이제 70년대 대표 더벅머리였던 존 레논을 넘어설 지경이 되어 있었다. 제발 머리 좀 깎자고 사정을 하던 참이었는데, 미장원 앞에서 내가 눈을 반짝이자 녀석이 웬일인지 별말 없이 순순히 미장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 엄마의 상처받은 마음을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희생해서라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얼마나 깎겠냐는 헤어 디자이너의 물음에 나는 “무쵸(많이)”를, 형주는 “뽀끼또(조금)”를 외쳤지만, 그녀는 이내 알아들었다는 듯이 웃으며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리마의 헤어 디자이너는 가위를 쓰지 않고 처음부터 계속 면도칼로만 머리를 깎았다. 내심 이상한 모양으로 깎는 게 아닌가, 혹시 다치진 않을까 싶어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결과는 우리 둘 모두에게 대만족이었다.
다시 잘생겨진 형주와 쫄랑대며 따라오는 제나의 손을 잡고 우리 셋은 케니 공원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공원 안에 유난히 많은 고양이들과 놀기도 하고, 길가에 전시된 화가들의 그림도 감상하고, 옷가게에 들러 살만한 옷이 있나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어둑해지자 공원의 작은 원형 공연장에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살사 춤판이 벌어졌는데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원형 공연장이래 봐야 지름이 7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는데 거기서 약 30명은 족히 넘는 수의 어르신들이 살사 음악에 맞춰 땀을 뻘뻘 흘리며 신명 나게 춤을 추셨다. 젊은이들이 뿜어내는 격렬한 열정과는 다른 노인들의 여유롭고 흥겨운 열정이 아름다웠다. 춤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제나가 내 손을 잡고 그 비좁은 공간으로 나를 끌어내리더니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서 신나게 춤을 추었다. 여권을 잃어버린 여행자의 슬픔에 빠져있을 틈을 주지 않는 내 여행 동반자들 덕분에 그래도 이렇게 웃을 수 있다.
일요일 밤이 되자 공원에는 온갖 주전부리를 파는 가판대들이 속속 등장했다. 저녁을 먹는 대신 가판대를 돌아다니면서 주전부리로 배를 채우고 있는데 볼리비아 라 빠스의 띠와나꾸 축제에서 만났던 Ian과 그의 동생을 공원에서 다시 만났다. 추위에 덜덜 떨며 아이들과 티격태격했던 띠와나꾸에서 그 새벽에 갑자기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 와 우리를 당황시켰던 그는 뉴욕에 사는 미국인이다. 인천의 달튼국제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서 한국말과 한국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우리에게, 특히 형주에게 형처럼 다정하게 대해줬었다. 그런 그와 이곳 페루 리마에서 반갑게 재회했으니 그 반가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여권 가방을 잃어버린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며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칠레의 북쪽 끝 해변 도시인 뜨루히요(Trujiyo)에서 그들의 부모님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뉴욕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아이들에게도 따듯하게 인사를 건네며 남은 여행기간의 행운을 빌어줬던 그들의 여행에도 마지막까지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
약속한 시간에 사진관에 들러 여권사진을 찾았다. 사진 속 인물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지금의 우리는 여권사진을 손에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내일부터는 임시 여권과 여권 재발급을 위한 행정업무가 시작될 것이다.
리마에서의 두 번째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