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리마 - 2015/07/07(화)
아침 일찍 페루 이민청으로 갔다. 여권가방을 도난당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곳에 오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피식 헛웃음이 새 나왔다.
열 개 넘게 늘어선 카운터에서 어느 번호에 줄을 서야 하는지, 물어물어 작성한 서류를 들고 어디로 가서 어떤 도장을 받고 누구에게 제출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 지루한 서류 작업이 언제 끝나는 건지 알지 못한 채 이민청 건물을 빙글빙글 돌며 간신히 서류 작업을 마치고 나오니 오전이 다 지나 있었다.
여권 분실 사건 때문에 예상보다 리마에 머무는 일정이 자꾸만 길어졌다.
페루의 북부 해변도시 뜨루히요(Trujillo)에 들러 거기서 하루나 이틀 머물다가 에콰도르의 과야낄(Guayakil: 갈라파고스로 사는 공항이 있는 도시)로 넘어가려고 했던 당초 일정에서 뜨루히요를 건너뛰고 바로 과야낄로 이동해야 갈라파고스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에 차질이 없을 것이다.
내가 가진 데이터로는 리마에서 과야낄로 가는 최단 경로를 찾을 수가 없어서 케니 공원 근처의 미라 플로레스 거리에 있는 여행사에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리마에서 치끌라요(Chiclayo)까지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국경을 넘어 과야낄로 가는 방법이 유일하다고 했다. 서둘러 크루즈 델 수르 터미널에 가서 뜨루히요행 버스표를 치끌라요 행으로 바꾸고 여행사를 통해 치끌라요에서 과야낄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200 sol이면 될 버스표를 80 sol이나 더 비싸게 주고 샀지만 그래도 그들 덕분에 갈라파고스행 비행기의 출발일 보다 하루 먼저 과야낄에 도착할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재발급되는 여권을 에콰도르 끼또(Quito)에서 받기 위해서 여권 배송 신청서를 DHL 편으로 한국의 언니에게 보내고 나서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리마에서의 첫날, 여권을 도둑맞고는 세상을 다 잃은 듯 낙심한 얼굴로 늦은 밤 아이들의 손을 잡고 호스텔로 들어선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고, 리마에서 머무는 동안 위로와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써주었던 호스텔 관리인과 헤어지려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리마에서의 나쁜 일은 잊고 좋은 일만 기억해달라는 그의 따듯한 인사를 뒤로 하고 치끌라요 행 버스를 타기 위해 크루즈 델 수르 터미널로 향했다.
리마에 있는 동안 자꾸 지연되고 변경되는 일정 때문에 숙소에서 꽤 멀리 떨어진 이 터미널에 하루에 한 번 이상씩 들리곤 했었는데, 이제 떠나면 이곳과의 악연도 끝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런데 버스에 짐을 싣는 순간 터미널 직원 두 명이 내 앞을 막아섰다. 내가 버스표 값 100 sol을 덜 냈단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서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하니, 같이 가서 CCTV를 보면 알 수 있을 거란다. 형주와 함께 가서 CCTV를 확인해보니 행선지를 뜨루히요에서 치끌라요로 변경할 때 추가로 내야 하는 돈을 꺼내서 들고 있다가 직원이 돈 달라는 말을 하지 않자 다시 지갑에 넣고 변경된 티켓만 받아 들었던 모양이었다. 꺼림칙한 마음으로 100 sol을 더 내고 버스에 올라앉으며 제발 이것이 리마와의 마지막 악연이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