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어민 교사 활용 수업이라고?
영어 교육에 대한 압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영어 몰입 교육’이란 것이 등장했다.
하다 하다 영어로 수업하기 열풍이 일었다.
영어보다 편리한 한국말을 제쳐둔 채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은 교사와 학생, 서로가 불편했다.
영어 교사는 100% 영어로 수업하기를 권장하는 공문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열풍에 휩쓸려 나도 TEE 자격증(Teaching English in English:영어로 진행하는 영어 수업)을 취득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과목도 '영어로 수업하기'를 권했다.
그래서 수업 공개하는 학교에 출장 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자 영어 교사들끼리 서로 출장을 기피하려고 했다.
출장 가는 날에는 오전에 수업을 몰아서 다 해치워야 했고
처리해야 할 업무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출장 순번을 정했다.
공개 수업 발표 현장에 가 보면 수학 교사가 영어로 수업하거나
체육 교사가 운동장에서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다.
단지 몇 마디만 외치는 수업일 뿐이었다.
STOP,
Go,
Shut up!
이명박 정부 대통령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영어 몰입 교육 제도 도입을 추진했으나
이명박 대통령이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라고 밝히면서 그것은 결국 백지화됐다. (발췌: 한겨레)
영어 교육이 활성화되면서 학교마다 영어 전용 교실 구축이 시작됐다.
내가 부임했던 학교도 발 빠르게 영어 전용 교실을 만들었다.
영어 전용실을 ‘English Zone’이라고 했고 그걸 줄여 ‘잉존’이라 불렀다.
원어민 교사 활용 수업
내가 발령을 받은 해에 공교롭게도 원어민 교사 활용 수업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다행히 10년 정도 어린이 영어 공부방을 운영할 때
원어민을 대해 본 경험이 있어서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원어민과 소통이 원활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치로 때려잡아 이해할 때가 많았다.
『인천 지역 초·중·고교에 원어민 교사가 배치돼 외국인 교사에 의한 영어 수업이 진행된다. 원어민 교사는 정규수업 외에 학부모 및 지역주민을 위한 영어교육과 방과 후 영어 체험 캠프, 지역별 교사 연수 등을 맡게 된다. 인천시는 원어민 교사 확보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 내 공신력 있는 교육기관을 통해 영어 교사를 선발할 계획이다. 선발된 원어민 교사는 교육 현장에 배치되기 전에 한국의 문화 및 기초적인 한국어 등을 교육받는다.』 (발췌: 경향신문)
우리 학교로 신규 발령받은 원어민, K는 캐나다 출신이었다.
그는 2학년 14 학급 대상으로 매주 한 시간씩 수업했다.
코티칭(Co-teaching)이지만, 영어 교사는
학생과 원어민 사이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했다.
K는 영어 수업 시간 내내,
-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 네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이냐?
-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
이런 질문이 전부였다.
그래서 원어민 활용 수업이란 것은
학생들이 원어민과 대면해 본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실 안에 45명의 학생이 있으니
대화를 한다거나 수업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원어민 교사는 주당 22시간 수업을 하게 되어 있었다.
정규수업 외에 방과후 학교 수업 6시간을 하고
점심시간에 학생 대상 프리 토킹 수업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영어 교사와 회화 수업을 했다. (14+6+1+1=22시간)
영어교사들은 학생 챙기기도 바쁜 아침에, 허겁지겁 모여서
원어민과 한 시간 정도 대화하는 타임을 가졌다.
특정 교재를 정하여 함께 읽으며 주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토론했다.
그러나 일정이 버거웠던 영어 교사들은 그 시간이 소중한 게 아니라
힘들게 부과된 업무의 연장으로 여겼다.
자신의 실력을 쌓거나 영어 회화하는 경험을 가지는 데 따로 시간을 빼낼 만큼
여유로운 교사는 아무도 없었다.
영어 교사들에게 남모르는 부담은 또 있었다.
원어민 교사 전담 업무를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어민이 입국할 때 출입국 사무소에 함께 들르는 일부터 시작하여
원어민이 지낼 거처를 마련하여 관리하는 일도 영어 교사가 맡았다.
심지어 페이슬립(Payslip:급여명세서)을 기안하고 관여하는 일도 했다.
나도 원어민 교사를 태우고 귀국 캐리어를 트렁크에 욱여넣은 채로 출입국 사무소에 갔다가
미리 구해둔 숙소에까지 이동시켜 준 적이 있다.
라고 한국말로 구시렁대면서...
그런 원어민 전담 업무를 몇 번이나 맡았다. 그때 우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고 있었을까?
아무튼, 아침 0교시에
원어민과 함께했던 그 수업은,
영어 교사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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