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박완서 작가의 글을!

- 《세상에 예쁜 것》을 읽으며

by Cha향기


처음으로 글을 재미있게 읽었던 때는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박완서 작가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신문 연재소설에 푹 빠졌다. 신문이 도착하면 고향 집 마루에 앉아 그것부터 읽었다.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읽었던 소설은 현실을 잊게 했다. 막막했던 앞길이나 잦은 부모님 다툼, 아슬하게 깨질 것 같았던 사랑마저도 나중 일이었다. 그 소설은 리얼하고 쫄깃하여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즈음에, 언젠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소설은, 수지가 동생 오목이의 손을 일부러 놓아버리는 사건이 중심이다. 피란길에서 벌어진 일이라 수지 외에는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전쟁 이후에 유복한 삶을 사는 수철, 수지 남매에 비해 오목이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 남매의 대비를 통해 전쟁 이후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숨겨둔 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오목이가 당하는 고통과 한, 억울함을 보며 마음이 아렸다. 연재소설이라 늘 다음 편이 궁금했다. 그래서 신문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대문 쪽을 엿보며 지냈던 시절이었다.

★ 자식 잃은 부모, 자식이 아픈 부모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7년쯤 전에, 또다시 박완서 작가의 글에 푹 빠진 적이 있다. 동료 교사의 고등학생 아들이 갑자기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동료는 숨이 멎을 것처럼 떨었다. 결국 동료는 명예퇴직했다. 그때 우리는 그 충격을 달래느라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박완서 작가가 쓴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을 릴레이 독서하듯 서로 돌려가며 읽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고통, 그 어떤 말로도 치유할 수 없는 참척의 아픔을 글로 대신한 책이었다.


그 책에서 박완서 작가는 말했다.

눈물로 쓴 박완서 일기: 연재에 앞서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이건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입니다. 훗날 활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거나,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닌 극한 상황에서 통곡 대신 쓴 것입니다.


그 책을 읽으며,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은 동료의 아픔이 내 것인 양 쓰라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내 아들은, 죽음과 진배없는 몸으로 6년째 병상에 누워있을 때였다. 아들은 갑자기 당한 사고로 몸의 온갖 곳이 다 마비되고 인지도 없는 사람이 되어 모든 일상을 내려놓고 말았다.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그 책에서 박완서 작가는, 한 지인을 방문했는데, 중증 환자인 아들을 향해 투덜대는 그 엄마가 부러웠다고 했다. 그런 몸 상태일지라도 그 아들이 살아있는 것이 부러웠다고 했다. 나도 그렇고 그 엄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들이 살아있다고 한들 참척의 고통을 겪고 있다. '참척(慘慽)'은 가장 참혹하고 비통한 슬픔이란 뜻인데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에게나 쓰는 말이다.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내 동료나 박완서 작가가 급성 참척을 겪었다면 나는 만성적인 참척의 아픔을 겪고 있다.

(관련기사: 6개월마다 겪는 초비상사태 "아들아, 이 밤을 견뎌다오" https://omn.kr/2fnsw).


2013년 1월에 친한 지인으로부터 박완서 작가의 <세상에 예쁜 것>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때같은 아들이 그렇게 누워버린 어미에게는 영화도, 여행도, 책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 책을 한 번 훑어보고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그러다 10년이 더 지난 이제야 읽게 됐다.


아들이 그때보다 나아진 것도 아니고 앞으로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14년 정도 지나고 나니, 그런 아들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덜 아픈 건 아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책꽂이에 꽂혀 있기만 했던 <세상에 예쁜 것>이라는 책을 펼쳤다. 그 책 첫 장에는 지인이 정성껏 적어 준 글귀가 있다. 그 메모의 의미가 이제야 오롯이 내게 닿았다.


▲ 지인의 메모 /'세상에 예쁜 것'이라는 책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책 첫 장에 적힌 메모가 참 따뜻하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의 미 출간 글들을 모아 묶어서 출간한 책이다. 작가 딸은 이 책을 발간하면서 말했다.

어머니의 책상 서랍에서 어떤 산문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글을 잘 정리하여 모아놓으신 묶음을 발견했습니다. (...) 작가로서 자존심과 엄격성을 잃지 않았고 시대를 살아온 어른으로서 세상에 좋은 기운을 남겨주시려고 애썼던 노력과 사랑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 "어머, 내가 쓴 게 이런 게 있었구나. 나도 잊고 있었는데."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길 바랍니다. (책 뒤표지에서)


이 책은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이다. 자신이 그 나이까지 꾸준히 소설을 써온 건, 이야기가 지닌, 살아내는 힘과 위안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나를 달구었던 것은 창작욕이 아니라 증오였다. 복수심과 증오는 세월의 다독거림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 뿐, 섣불리 표현되어선 안 된다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상상력은 사랑이지 증오가 아니기 때문이다. (…) 증오가 연민으로, 복수심이 참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비로소 소설을 쓸 수 있었다. (22P)


그도 그럴 것이, 6·25 전쟁을 겪으며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싸움을 목격한 작가는 고향마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동족끼리 싸우는 전쟁이 가장 끔찍하다고 표현했다. 집집이 한두 식구 죽거나 납치당하지 않은 집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민간인 인명 피해가 막심한 전쟁을 겪었다. 오빠와 삼촌, 사촌이 비참하게 죽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들을 등장시켜 이 상황을 소설로 쓸 것 같은 예감을 하게 된다. 그 예감만으로도 그 인간 이하의 수모를 견디는 데 힘과 위안이 되었다고도 했다. 작가는 문학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복수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작가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세상에 예쁜 것' (81~84)에 있다고 본다.


고통스럽던 병자의 얼굴에 잠시 은은한 미소가 떠오르면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니 잠든 아기의 발바닥이었다.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 발바닥의 열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 탄성이 나올 만큼, 아니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수명을 다하고 쓰러지려는 고목이 자기 뿌리 근처에서 몽실몽실 돋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그 고목은 쓰러지면서도 얼마나 행복할까. (…) 아기의 생명력은 임종의 자리에도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83P)


이 책은 총 5부로 나뉘어 수록된 글 38편이 묶여 있다. 박완서 작가 특유의 감성과 혜안으로 풀어낸 삶 속에서 건져낸 에피소드를 통해 박완서라는 대 작가를 되새겨볼 수 있다. 독자와 나눈 대담, 강연, 초등학생의 질문지에 적어 준 답, 편지와 헌사 등 다양한 형식을 띤 글들을 통해 작가의 통찰과 중심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책을 읽을 수 있다. 이참에 박완서의 작품을 더 많이 읽어볼 참이다. 그래서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애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에세이집도 챙겨놨다. 책을 읽으며 삶을 묵상하고 한 해를 박완서적인 감성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 박완서 에세이를 읽기로 했다.


책은 길이 보이지 않는 숲을 걸을 수 있는 길로 만들어 주는 낫과 같다. 돌부리에 차이고 걸어갈 수 없는 곳을 만나도 책에서 안내받았던 인생 통찰이라는 연장으로 앞길을 쉽게 터 나갈 수 있겠다. 설령 숲처럼 빽빽한 곳을 걸을지라도 책이 내 발길에 등불이 될 수도 있겠다. 그것이 박완서 작가님의 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또다시 박완서 작가의 글을 마주하니
20대 그때처럼 마음이 설렌다.


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은이), 마음산책(2012)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93866

#오마이뉴스

#박완서

#세상에예쁜것

#한말씀만하소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 방사선사가 촬영하는 행복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