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나태주 시인 산문집 <마흔에게>
나도 모르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라는 시를 중얼거렸다. 엄동설한 끝자락에 봄 내음 가득한 풀꽃 시를 읽고 싶어졌다. 봄은 시심(詩心)과 함께 오나 보다.
오래전 동료에게 선물 받았던 나태주 시인의 캘린더 일력을 이리저리 넘겨봤다. 캘린더는 한 해만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심코 밀쳐두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매년 사용할 수 있는 캘린더였다. 매일매일 날짜가 적혀 있지만 요일은 보이지 않으니 그게 가능하다.
1년 365일, 빠짐없이 시화로 꾸민 탁상용 캘린더. 그것을 아침마다 한 장씩 넘기며 시를 읽었다. 짧고 쉬운 시와 그림에서 시인의 사유와 인생철학을 엿볼 수 있다. 봄을 닮은 시가 내게 닿았다. 그래서 시 몇 편을 사진으로 찍었다.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대출하려고 했으나 내 손길이 머문 곳은 <마흔에게>라는 그의 산문집이었다. 진녹색 표지가 마치 내게 손짓하는 듯했다.
나태주 시인은 43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했다. 창작 시집 50권을 비롯하여 동시집, 시화집, 산문집 등 200여 권을 출간했다.
그분의 딸은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나민애 교수다. 나민애 교수는, "여든의 나이에 책을 출간하는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어른으로 생각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라고 말한다.
여든의 시인이 마흔을 건너는 이들에게 전하는 격려의 이야기, <마흔에게>는 예순을 훌쩍 넘은 내게도 깊은 공감을 줬다.
'미리 쓰는 편지-아들과 딸에게'를 읽다가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이 글을 쓰면서 느꼈을 작가의 마음이 오롯이 내게 전해졌다.
다만 구체적인 부탁이 있다면 상가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조의금은 받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내가 살면서 더러 보았는데 조의금을 받지 않는 상가가 참 깔끔하고 다녀오면서 느낌이 좋더라. (...) 자, 그러면 너희도 너희들 몫의 인생 잘 살다가 오너라. (...) 먼저 간다. 뒷일을 잘 부탁하마. -36p
타인의 유언이 이렇게 내 가슴을 후벼 팔 줄 몰랐다. 그래서 나도 딸내미에게 미리 편지를 써두고 싶었다.
[내가 치매에 걸려 정신이 없거나 나 스스로 거동을 못 하면 조금도 갈등하지 말고 노인 의료 복지시설에 입소시켜도 돼.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그런 일로 섭섭해하지 않으마. 그리고 네 동생 oo이는 중증 장애인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도록 해라. 부모인 우리는 14년을 긴 하루처럼 돌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보호자를 호출할 때면 한 번씩 가서 동생을 쳐다봐 주기를 바랄게. 그러면 인지 없는 oo이가 안도감을 느낄 테니까.
외할머니는 자기를 요양원에 보내면 접시물에 빠져 죽겠노라고 입버릇처럼 하셨어. 그런데 막상 요양원에 들어가신 이후에는 적응을 잘하시더라.
“엄마 집에 갈까?”라고 하면, “아니, 여기서 잘 먹고, 잘 노는데 뭣 하러 집엘 가? ”라고 하시더라. 자식이 그립지 않나 봐.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더라. 그런 감정들이 다 사라지나 봐. 그러니 내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면 네가 감당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라. 너는 너의 몫의 인생을 살아라. 부디 행복하게 살길...]
눈물을 훔치며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이어서 책을 읽었다. '내가 잘한 일 네 가지'라는 글. 작가가 스스로 잘했노라고 여기는 네 가지는 시골에서만 산 것, 초등학교 교사로 일관한 것, 시를 계속 써온 것, 자동차 없이 산 것이라고 한다. 소박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가 시인의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목마와 딸기'라는 글은 애잔했다. 그 시절 초등학교 교사 외벌이 수입이 어떠했는지 가늠 됐다. 리어카 목마를 타고 싶다고 딸이 졸라도 선뜻 태우지 못한다. 목마 리어카 음악 소리가 딸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세숫대야를 빨랫방망이로 두드려 무마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샤히라의 <풀꽃>'이라는 글에서는 읽는 속도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 <풀꽃>을 아프리카 알제리에 사는 샤히라도 알고 있었다.
세계에서 시를 가장 사랑하는 나라인 영국 사람들이 그런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 한 사람과 인도를 바꾸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문학 작품을 읽기 위해서라도 영어는 배울 가치가 있다." 이 말에 대응하여 이렇게 적어본다. "<풀꽃> 한 편을 읽기 위해서라도 한국어는 배울 가치가 있다." 감히 꿈꿀 수 없는 일을 꿈꾸어본다. -93p
'나는 과연 안녕한가?'라는 글 중 소름 돋는 부분이 있었다.
나 한 사람 없어지면 이 세상 전체가 사라지게 된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주 전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어디까지나 내가 있고 나서 세상이고 우주다. 그처럼 나의 존재는 소중한 것이고 유일한 것이고 절실한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나도 간간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대부분의 불행은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내 삶의 기준이 나에게 있지 않고 타인에게 있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라고 꼬집는다.
시 한 편에 또 눈물 바람이었다.
하나님 / 오늘 하루도/ 잘 살고 죽습니다 / 내일 아침 잊지 말고 / 깨워주십시오. <잠들기 전 기도> -224p
작가는 크게 바라는 것 없이, 하나님이 내일 아침에 또 하루를 살도록 깨워주시라는, 사소하지만 가장 소중한 기도를 드린다.
이 책에는 삶의 편린이 잔잔하게 그려졌다. 소박하고 잔잔한 삶 속에 위대한 사유가 담겨 있어서 의미가 깊은 책이었다. 어려운 어휘도 없고 이해되지 않는 문장도 없었다. 그런데 심오한 진리가 녹아있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쓰는 산문이요,
국민 시인이 쓰는 에세이다.
P.S. 작가의 소소한 삶을 동경하며 봄 내음 가득한 시화 몇 편을 모작하여 대춘부(待春賦)에 갈음한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09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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