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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Nov 03. 2022

이제는 홍시가 맛있다

- 홍시에 얽힌 기억의 편린들

주말에 시골을 다녀왔다는 교회 집사님이 잘 익은 홍시를 들고 오셨다. 나는 홍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와는 달리, 남편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홍시였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홍시가 싫지 않다. 나도 이제 홍시가 달고 맛있다. 집사님이 주신 달달한 홍시를 먹으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겨보았다. 그리고 집사님께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홍시를 잘 먹지 않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감나무가 없었지만 옆집 흰바우댁은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초가 삼 칸 오두막집이었던 우리 집과는 달리 흰바우댁은 고대광실 큰 집이었다.  골목으로 통하는 흰바우댁의 대문은 넓었고 좌로는 사랑채가 있었다. 그 사랑채만 해도 우리 집보다 컸었다. 오른쪽으로는 외양간에 살찐 소들이 몇 마리 있었다. 넓은 마당을 지나면 부엌 옆에 도르래를 매달은 우물이 있었다. 윗채는, 축담으로 높여져 있어서 본채의 위엄을 뽑냈다. 그집은 좁은 툇마루가 아니라 큰 방과 작은 방 사이에도 넓은 마루가 있었고 흰바우댁의 손길로 그 마루는 언제나 반들거렸다. 윗채 왼쪽에는 수령을 헤아릴 수 없는 큰 감나무가 있었고 가을이 되면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많은 감이 열렸다. 세월이 50년도 더 지났지만 그 집의 구석구석이 눈앞에 선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난생처음으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처녀작: 흰바우댁과 우리 집을 기억하여 그리다]

여름날 작은 방 벽의 쪽문을 열면 흰바우댁 감나무 잎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향긋했었다. 


"톡 톡 톡"

때로는 설익은 감이 떨어지는 소리가 좁디좁은 뒤란에서 들리곤 했었다. 뒤란에는 할머니의 요강이 있었고 그곳은 언제나 그늘이 져서 침침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뒤란에 떨어진 풋감을 주워서 소금물에 삭혀두었다가 '삭힌감'을 만들어 먹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 그것은 우리 조무래기들에게 별미였다. 감잎이 하나둘씩 붉게 물드는가 싶으면 곧 서리가 내렸다. 그 때쯤이면 흰바우댁 감나무에는 홍시가 주렁주렁 달렸다.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홍시는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 뒤란이나 기왓장에 떨어진 홍시는 박살이 나서 아예 주울 수도 없게 되곤 했다. 뒤란에 심부름을 가다가 홍시를 밟아서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살그머니 떨어져서 먹기에 좋은 상태인 홍시를 발견하면 우리는 횡재한 기분이었다. 일단은 할머니께 먼저 갖다 드리면, 할머니는 앞니가 몽땅 빠져서 오물거리는 입으로 활짝 웃으며,

"잘했네, 잘했어."

라고 칭찬하셨다. 할머니는 홍시를 혓바닥으로 홅아 빨아 드시거나 숟가락으로 긁어서 드셨다. 우리는 할머니가, "이젠 너희들 먹어라."라고 하시면 온통 귀를 뒤란 쪽으로 기울였다. 그 다음부터 떨어지는 홍시는 우리들 차지였기 때문이다.


"타닥!"

이소리는 홍시가 깨지지 않고 떨어지는 소리였다. 우리는 상처 나지 않고 얌전하게 떨어진 홍시를 주워서 나누어 먹었다. 홍시는 1/n 나눌 수가 없었다. 서로 돌려가며 한 번씩 베어 먹거나 빨아먹었다. 우리는 홍시 하나 앞에서 콧물을 훌쩍거리며 자기의 순서를 기다렸다. 

'차라리 내가 홍시를 먹지 말자.'  나는 슬며시 홍시는 먹지 않겠다고 남몰래 결심했다. 나 하나만 빠져도 다른 동생들이 홍시를 한 번 더 빨아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 홍시는 웬만하면 먹지 않게된 것 같다.


흰바우댁 자녀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감나무 하나도 없고 남루하고 누추한 작은 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며 옆집 감나무에서 떨어진 홍시를 애절하게 나눠 먹었던 우리 5남매는 어엿하게 자라서, 이제는 교장, 교사, 선교사, 자산가, 복지 센터장이 되었다. 그 감나무에는 아직도 해마다 홍시가 주렁주렁 열릴까? 나의 고향, 그 옛집 뒤란에 떨어지는 홍시는 누가 주워먹을까?


대학을 졸업하면 곧바로 교사 발령이 날 줄 알았던 내 앞길은 생각과 달랐다. 미발령 교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먼저 친구 A에게 갔다. 교대를 졸업한 친구 A는 2년 먼저 섬마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가장 어정쩡한 달 2월에 그 친구의 방에서 가장 어정쩡한 내 인생의 한 때를 보냈다. 3월에는 하동 악양(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에 있는 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이 났던 친구 B에게 가서 몇 날을 보냈다. 막막한 자에게 다가온 봄은 처절했고 바람마저 가슴을 후벼 팠다. 친구는 외롭고 무섭다며 한사코 나를 붙들어 두려고 했다. 그러나 '외롭고 무서운 것' 보다 더한 것은 '미래가 막막한 것'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다시 친구 C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남해 미조항으로 갔다. 잠 못 이루고 하얗게 밤을 새우고 나면 밝아오는 새 날과 함께 밤새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뱃고동 소리는 슬픔의 극치였다.


그 해 가을에는 친구 D가 사는 부산으로 갔다. 여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공무원이 된 친구 D는 부산 서면 로터리를 지나서 사상 근처에 살고 있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면 홍시가 길가 과일가게에 즐비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친구 D는 홍시를 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퇴근길에 홍시 몇 개를 사서 종이봉투에 담아오곤 했다. 그러잖아도 홍시를 멀리했는데 미안하게 빌붙어 지내는 입장에서 친구가 사주는 홍시는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았다. 그 해 겨울 내내 홍시 하나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남편은 전라도 사람, 나는 경상도 사람, 우리는 영호남 커플이다. 지역감정이 어쩌니 해도 우리 부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90년 대 초에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는 앙숙이요 라이벌이었다. 우리 부부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어쩌다가 야구를 함께 보게 되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고 남편은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해태가 훨씬 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삼성에서 만루 홈런을 날리면서 예상을 뒤엎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남편은 귓볼이 빨갛게 될 정도로 해태를 응원하고 있다가 끝내기 홈런을 당하니 속이 상할 대로 상했던 것 같다.

"당신은 내가 투명인간으로 보여?"

- 왜요?

"내 기분은 생각 안 해?"

- 뭐가요?


나는 때로 센스가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남편의 기분을 1도 생각하지 못하고 삼성이 홈런을 날린 것에만 좋아하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 왜? 그냥 경기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나는 죽을 맛인데 당신은 내 앞에서 춤을 춰?"

- 그게 뭐 어때서?


그 일이 시발점이 되어 우리는 이것저것 섭섭하다며 한 참 말다툼을 했었다. 남편이 그렇게 삐지는 모습을 처음 봤었다. 그리고 한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잘 생각해보니 내가 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홍시!'

나는 앗싸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당장에 탐스럽고 빨간 홍시를 사 와서 남편 앞에 내밀었다.


- 당신 좋아하는 홍시 사 왔으니 드시고 기분 푸셔. 남자가 뭐 그런 일로 쪼잔하게~

"한 번 먹어볼까?"

- 맛있어?

"응, 무지무지 맛있어."

- 나한테 하나 먹어보라고도 안 해?

"당신은 홍시 안 먹잖아?"

- 그렇지. 나는 홍시를 싫어하지.

그때도 나는 의식적으로 홍시를 거절하고 있는 듯했다. 남편이 혼자서 그 맛있는 홍시를 다 먹어치울 동안에 나는 홍시에 입을 대지 않았다.


어떤 유행가에는,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라는 가사가 있다. 하지만 나는 홍시를 보면 몇 가지 기억의 편린들이 떠오르고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요즘은 나도 홍시가 눈 앞에 있으면 먹게 된다. 홍시는 달고 맛있다.나도 이제는 홍시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일부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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