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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Dec 11. 2022

밤, 밤 밤 밤

알밤을 먹을 때면 떠오르는 단상들

해마다 가을이 되면 햇밤을 오도독 오도독 소리 내며 고 싶다. 생밤의 맛은 달지 않고 고소하지도 않다. 고소한 맛은 질리고 단 것은 더욱 싫어하는 내게는 생밤이 참 맛있다.


남편은 매주 한 번씩, 재래시장에서 밑반찬을 사 온다. 그런 남편이 한겨울에 때 아닌 생밤을 사 왔다. 겉껍질을 깎아내고, 보니(율피)를 도려낸 생률 밤을 팔고 있는 것을 보니 생밤을 좋아하는 내 생각이 났던 모양이었다. 내가 올해 햇밤을 먹어보지 못하고 가을을 보냈다는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풋풋한 생밤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햇밤을 보니 반가웠다.  


"에헤라 생률 밤이로구나~"라고 흥얼거리며 밤을 씹어 먹는데 밤에 얽힌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밤나무집

우리 골목 끝집은 분선네였다. 더러는 분선네를 '밤나무집'이라고도 불렀다. 아마도 예닐곱 살 때의 일인 것 같다. 분선네에 심부름을 갔었다. 마당 한쪽으로 짙은 갈색의 동그란 것이 내 발 앞으로 굴러왔다. 반들반들한 갈색이었다. 나는 얼른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밤이네. 누가 주더노?"


할머니께 그것을 보여드렸다.  할머니는 딱딱한 밤 껍데기를 벗겨내고 다시 부엌칼로 보니(율피)를 날렸다. 할머니는 반은 당신이 드시고 나머지는 내게 내미셨다.


"주웠어요. 밤."


그때 처음 먹어본 밤은 나에게 별미였다. 몇 개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맛이었다. 그날 이후에 밤을 또 줍고 싶었다. 장날이 되면 분선네가 닷새장에 가곤 했었다. 장날이 되면 분선이 동생 판덕이와 굳이 친한 척하면서 분선네 뒷밭으로 올라가서 밤을 찾았다.


"이렇게 하면 돼."


밤나무집 아들, 판덕이는 밤 까기를 참 잘했다. 판덕이는 밤송이를 한쪽 발로 밟고 돌멩이로 밤송이를 여러 번 짓이기듯 내리쳤다. 그러자 녹색 밤 껍데기 속에 진한 갈색 알밤이 보였다. 그러면 나는 손뼉을 치면서 소리치곤 했었다.


"와, 밤이다. 밤."

  

판덕이는 밤송이를 찾아내어 돌멩이로 밤송이를 내리치며 알밤을 잘도 볼가 냈다. 때로는 열심히 밤송이를 벗겨냈으나 쭉정이만 덩그러니 있기도 했었다.


"나, 니가 좋아."


판덕이는 반들거리는 알밤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나는 판덕이의 첫사랑이었다. 그 이듬해 봄에, 분선네는 함석 대문을 만들어 달았다. 동네 조무래기들은 더 이상 분선네 뒷밭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가을이 되면 뒷산으로 올라가서 밤나무집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애타게 밤을 줍고 싶어 했다. 탱자나무 가시가 번번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판덕이는 작대기로 탱자나무를 여러 번 내리치더니 사람 하나 기어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을 만들었다.


"니만 들어와."


판덕이는 나를 빤히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의기양양해졌다. 그 개구멍으로 기어 들어가서 몇 번인가 밤을 주웠다. 판덕이가 하던 대로 따라 하다가 밤송이의 뾰족한 가시에 찔린 기억도 있다. 


있는 사람이 더 징하다

밤을 먹으면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대학 때 자취하던 집이 떠오른다. 미영이는 주인 댁 딸내미였다. 양갈래 머리를 예쁘게 묶고 검은색 단화를 신었던 미영이는 시골 출신인 내 눈에는 귀티가 좔좔 흘렀다. 미영이의 엄마는 늘 발끝까지 끌리는 긴치마를 입고 있었고 미영이 아빠가 집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낮이고 밤이고 본채 침대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미영이 엄마의 킁킁거리는 웃음소리가 방문 밖으로 흘러나오곤 했다.


미영이네 본채에는 방이 4개 있었다. 본채 오른쪽에는 자취방이 서너 개 있었고 문 입구에는 마트와 쌀가게를 하는 상가와 그에 딸린 살림 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상가 위층에도 4개의 살림집이 더 있었다. 누가 봐도 돈깨나 있는 건물주임이 틀림없었다. 미영이네 할머니가 일군 재산인 게 뻔했다.

그런데 그 미영이네 할머니는 늘 같은 색깔 몸빼 바지를 입고 큰 다라이에 밤을 한가득 머리에 이고 집안으로 들어오곤 했다. 밤을 잔뜩 담은 다라이는 보기에도 무겁게 여겨졌다. 미영이네 할머니 목 고개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그 미영이네 할머니는 물이 듬뿍 묻어서 다 불은 밤 껍데기를 깎아내고 다시 보니(율피)를 칼로 날리는 부업을 했었다. 미영이네 할머니가 그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 미영이네 엄마는 손톱 손질이나 할지 언정 함께 그 일을 돕지는 않았다. 미영이네 할머니는 있는 게 돈 밖에 없을 것 같았는데 여전히 돈이 되는 일이라고 밥 껍데기 까는 일을 밤낮없이 했었다. 


"있는 사람이 더 징해"


쌀가게 아주머니는 늘 미영이네 할머니의 밤 까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쑥덕댔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다


알밤을 먹으면 떠오르는 분이 있다. 천사 같이 심성 고왔던 시누님이다. 그 해 가을에 교회 주일 학교 2부 순서로 밤 줍기를 하러 갔었다. 밤나무 숲에서 우리들은 신나게 밤을 줍고 있었다.


"뱀이 나올지도 모르니 모두들 조심하세요."


주일 학교 전도사님은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뱀을 조심하라며 큰 목소리로 안내했다. 한창 밤을 줍고 있는데도 머리 위로 밤송이가 떨어지기도 하여 우리들은 깔깔대며 밤 숲에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아주 심각하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


"누님이? 아~"


남편은 사색이 된 표정이었다. 시누님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온 산에 흩어져 있던 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누님은 손 쓸 겨를도 없이 몇 날이 못되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올해도 어김없이 풋밤을 맛있게 먹었다. 밤을 오도독 오도독 씹으면서 판덕이 생각을 해봤다. 지금 어디에선가 자신의 첫사랑도 까맣게 잊은 채 살고 있을 판덕이는 안녕할까? 


돈이 그렇게 많아도 밤 껍데기를 깎는 부업으로 고개가 휘어질 듯했던 미영이네 할머니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모아 두었던 돈 그대로 남겨 둔 채로...


이 좋은 세상에, 마흔 갓 넘어서 세상을 떠나 버리신 시누님의 삶이 참 안타깝다. 


알밤을 먹을 때면 세 가지의 일이 오버랩되어서 배시시 웃다가도 목이 울컥해지곤 한다.


[사진: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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