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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Feb 12. 2022

외숙모님

-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 예감

   외숙모가 조만간 돌아가실 것 같은 예감은 며칠 전부터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열흘 전이다. 외숙모에 대해 말하려면 어머니 얘기부터 해야 한다.

   요양원에서 3년 정도 지내신 친정어머니가 뇌 연화로 감정조절이 되지 않아서 한사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집이라 말하는 곳은,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지내셨던 대구에 사는 여동생네를 말한다. 사업을 하는 여동생이, 섬망 증세가 있는 어머니께 붙어서 보살필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울산에 사는 오빠도 있지만, 올케가 현직에 있으니 그곳도 마찬가지로 애매하다.

  정답 없는 문제지를 들고 끙끙대는 수험생들처럼 의논하던 중에 진주에 사는 여동생이 조심스레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다. 그 동생은 대수술도 여러 차례 했고 허약한 몸으로 근근이 센터를 운영하는 터라 가장 불가능한 곳이라 해야 할 곳이다. 그렇다고 내가 용기를 내어 손을 들 수 있는 상황은 더욱 아니었다. 아들이 10년이나 식물인간 상태의 중병으로 누워있는데 거기에다 어머니까지 돌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다. 독일에서 7년째 선교사 사역 중인 남동생은 물망에도 못 올린다.  결국 5남매라도 부모를 쉽게 모실 수 없는 상황을 보니 우리 가정만이 안고 가는 문제는 아니지 싶다. 고령화 시대에 가정마다 예외 없이 짊어지고 갈 큰 문제인듯하다.


   - 핑계

   아픈 아들 핑계를 대고 어머니와 단절 아닌 단절을 하고 지내다가 큰 맘을 먹고 시간을 내어 남편과 진주에 갔다. 어머니의 증세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모든 조건을 차치하고 어머니를 봬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분노 조절을 못 해서 약을 좀 더 드렸더니 사흘간 아무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우리를 또렷하게 알아보셨다. 당신의 손주가 사고로 그렇게 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시며 딸이 그 상황에서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 대단하다며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뇄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자꾸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왜 저러노? 왜 저 아가씨가 계속 우리 엄마한테 염을 하노? 고만해도 되는데.”

  당신의 침대 밑에 외할머니 시신이 있다며 계속 치우라고 하셨다. 외숙모의 건강이 요즘 썩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엄마, 혹시 그 시신이 외숙모인지 한번 잘 보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그 말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으시며 자꾸 그걸 치우라며 투덜대셨다. 이승에 있으면서 뜬 눈으로 그런 것을 보고 계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등골이 오싹했다.

  그런데 어제, 가족 단톡방에 외숙모의 부고장이 올라왔다. 어머니가 한사코 시신을 치우라고 잠꼬대 같은 말을 한 것이 외숙모의 별세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 학골, 외가

   내가 외숙모를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이다. 세상에 둘도 없이 귀한 아들이었던 외삼촌이 장가를 가셨다. 사모관대를 쓰고 전통 혼례를 올리는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외가는 유교 사상이 깊었다. 외가의 성씨는 고성 이 씨였다. 본명이 이이(李耳)였던 노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깊어 일상생활에서도 예의와 법도가 최우선이었다. 그런 집에 내리 딸만 여섯이 태어났다. 남존여비가 유독 강했던 집안에 맨 마지막으로 태어난 외삼촌은, 그야말로 불면 날아가랴 애지중지 외조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듣기로는, 아들을 떼어놓을 수가 없어서 외삼촌을 상급학교에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외가는 학이 너울거리며 날아다니는 학골이었다. 집을 떠나 외가에 가면 학이 먼저 앞길을 인도해주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 외가는 십 리도 안 되는 곳이지만 산 너머에 있었으니 산모퉁이 자갈길을 완행버스를 타고 가야 했는데 그게 내 인생 처음으로 집 떠나는 여행이었다. 외가는 마을의 맨 윗집이었다. 동네의 오르막을 오르면 외가의 굴뚝이 보였다. 그 굴뚝에서는 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작고 부지런한 외숙모는 외가의 정주간에서 무엇인가를 만들고 계셨다. 우리가 당도하면 화사하게 웃으며 달려 나와서 끌어안아주시면서 칭찬부터 해대셨다. 눈이 예쁘네, 코가 귀엽네! 라며 환영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황송하고 감사하다. 당신의 5남매에다 시누이들의 자녀들이 틈나면 손님으로 들이닥치니 외가는 늘 북적댔다. 시누이들이 자녀를 오륙 칠 남매씩을 낳았으니 외숙모의 조카들은 그 수가 어마했다. 먹을 것도 변변찮았을 그 시절인데도 외숙모는 두리상이 내려앉을 정도의 산해진미로 어린 우리를 귀빈처럼 대해주셨다. 지금도 외갓집을 생각하면, 고봉 가득했던 하얀 쌀밥과 각종 한과, 동치미, 그리고 홍시 등 먹을 것이 지천이었던 기억이 막막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배가 불러온다. 방학이 되면 외가에 다녀오는 것을 친구들에게 큰 벼슬이나 한 듯이 우쭐대며 자랑했었다.

고령군 쌍림면 학골

   외할머니의 기센 시어머니 노릇을 꿋꿋하게 받아내시며 집안 대소사는 물론 끊임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을 환대하며 치다꺼리를 해내시던 외숙모는 소리 없는 거인이셨다. 100세까지 사신 외할머니가 심한 치매에 걸려서 며느리를 괴롭히고 의심했는데 그 등쌀을 바람처럼 맞으며 사셔서 효부상도 받으셨다.

저녁이 되면 마을로 돌아오던 학무리

   내가 여고에 들어갔을 즈음에는, 이모들의 자녀들까지 결혼하여 외가에 모임이 있으면 관광차를 대동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외숙모는 말없이 언제나 웃으며 그 일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일을 해내셨다. 내가 외숙모를 못 뵌 지는 30년도 더 됐다. 이제 시간을 내어 찾아뵙고 정담을 나누고도 싶을 즈음에, 아들이 덜컥 사고를 당하여 병간호에 매달리다 보니 내 발은 꽁꽁 묶이고 말았다.



  - 비밀, 그리고 후회

  외숙모와 나만 아는 비밀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동구밖에 떨어진 살구 줍기를 했던 일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살구나무 밑에 가보면 노란 살구가 풀밭에 가득 떨어져 있었다. 한 걸음만 늦어도 그걸 주울 수 없었다. 곤히 자는 나를 외숙모가 흔들면 나는 눈을 비비며 동구 밖으로 달려가서 노란 살구를 몽땅 주워왔다. 지금도 살구를 먹으면, 나를 살구나무 밑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외숙모 생각이 뭉클 떠오른다. 그래서 해마다 꼭 살구를 한 번 정도는 사 먹는다. 그리운 맛이다. 외숙모 맛이다.

  또 하나는, 내가 첫 생리를 외가에서 치른 것이다. 성교육이 없던 시절인데, 외가에서 자고 났던 어느 날, 내 아랫도리에 생리가 보여 무척 당황했었다. 통시(‘변소' <便所>의 방언 <경상도:화장실>)는 마당을 가로질러 짚으로 된 길을 밟고도 한참 가는 곳에 있었다. 닦는 휴지도 변변찮은 시절에 나의 뒤처리는 상상만 해도 짐작이 된다. 그 치다꺼리를 외숙모가 다 하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춘기 어린 마음에 외가에 발길을 끊었다.

   인생이 이렇게 긴 하루처럼 후딱 끝나버리는 것인 줄 알았더라면 그 부끄럼 다 버리고 몇 번쯤 외숙모를 뵈러 갔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가슴을 후빈다.


  - 한 줌의 흙

   외숙모의 질환은 파킨슨병이라 했다.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은 도파민 세포가 사멸되면서 나타나는 신경계 퇴행성 질환이며 증상은 안정 떨림, 근육 경직, 운동 완서(緩徐, 느려지는 증상), 총총걸음, 그리고 비정상적인 자세 고정 등이 있다고 ‘지식인’에서 알려준다. 그렇게 착하고 고운 분에게 이런 병이 왜 왔을까? 그런 병이 왔다하더라도 많지 않은 연세, 78세에 이승을 떠나시는 걸까? 외숙모의 한평생을 생각하니 맘이 아린다. 외숙모는 화장되어 학골 선영에서 한 줌의 흙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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