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쁜 하루
25년 7월 00일, 날씨: 오락가락, 지 맘대로
'백수'가 과로사한다라는 말을, 어떤 지인이 '백조'가 과로사한다라고 에둘러 말하여 빵 터진 적이 있다. 이 말이나 그 말이나 다 맞다. 아무튼, 난 '백조'는 아니지만 엄연한 '백수'다.
남편이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 센서등이 켜지는가 싶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다른 날보다 요란하다. 내가 설정해 둔 아침 기상 알람이 울리기까지 30분도 더 남았는데... 로켓프레시로 주문했던 무가당 요거트가 도착했나 보다. 찌찌직, 찌찌직, 찍찍이를 뜯어 요거트를 꺼내놓고 프레시백을 밖으로 내놓는 소리가 들린다. 구매했던 실내화도 도착한 모양이다. 매일 몇 개씩 당도하는 택배. 그냥 현관문 앞에 놔두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정리할 텐데... 그는 아침마다 현관 밖에 와 있는 택배 물품을 거실 안으로 기어이 들여놓는다. 남편이, 자잘한 일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잘 도와주지만 정작 힘들고 어려운 일은 늘 내 차지다. 우린, 뭔가 역할이 뒤바뀐 모양새다. 시원시원하지만 실수 투성이인 나란 사람, 그리고 꼼꼼하고 느리지만 뒷손 볼 것 없는 남편, 그래서 우린, 잘 안 맞는 것으로 치면 천생연분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라탄 실내화를 신는다. 그 실내화를 신으면 발바닥이 덜 아프고 쿵쿵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아 일석이조다. 남편 실내화가 꽤 낡았다. 그래서 예전에 잠깐 신다가 짱박아 두었던 천슬리퍼를 신으라고 했다. 그게 떨어지면 라탄 실내화를 사겠노라고 했다. 착한 아이처럼 그러마고 하며 천 실내화를 신는가 싶더니 남편 표정이 영 아니다.
"이건, 뭔가 불편해. 신던 거랑 같은 걸로 구입하시오." 은근히 까다로운 샌님이다. 아무거나 끌고 다니면 될 텐데. 한낱 집안에서만 신는 실내화인데... 천 실내화가 싫다는 남편 말에 뾰로통해져 당장 라탄 실내화 구매 버튼을 눌렀었다. 두어해 신을 만큼 구입했다. 내 것과 남편 것, 각각 4켤레씩. 총 8켤레가 새벽 로켓 배송으로 왔다. 그러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난스러웠던 게다.
남편은 아침 식사로 구운 계란, 야채 스틱, 견과류를 챙겨서 아들이 있는 본가로 간다. 이 동네 칸트라는 별명을 내가 지어 줬다. 눈비가 와도 어김없이 그는 아들에게 간다. 아들은 13년째 세미코마 상태로 병상에 있다. 6년은 병원에서 지냈고 본가로 온 지 7년째다. 아들은 인지 제로 상태다. 절대무능이다. 아침마다 그런 아들을 향해 가는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할까? 언제 끝날 지도 모르며, 무한 반복되는 형벌을 통해 부조리한 삶과 인간의 저항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시지프 신화 속 같기도 하다. 남편은 수없이 좌절하고 남몰래 눈물도 훔쳤으리라. 모두들 활기차게 출근하는 아침에, 남편은 기죽은 어깨를 한 채 털레털레 아들에게 간다. 말 한마디 못하고, 눈 맞춤 한 번 없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마음이 먼저 달려가는 아이러니한 아침 걸음이다.
부스럭대는 소리 때문에 선잠에서 깼지만 남편을 탓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을 하는 남편이거니와 나는 말 그대로 백수지 않은가? 그렇지만 백수도 아침을 먹어야 한다. 지인에게 받은 소떡소떡이 냉장고에 있다. 포장지를 뜯어 레인지에 데운 후에 디카페인 커피, 치즈, 구운 계란, 토마토, 요거트 등으로 아침식사를 끝냈다. 간편식이지만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다.
간밤에 다림질해 둔 옷이 거실에 잔뜩 널브러져 있다. 다림질해 뒀던 남편의 7부 여름용 바지 세 벌, 내가 입을 여름 용 면티도 서너 장을 예쁘게 정리했다. 또한 가족티를 구입하여 세탁한 후에 건조기에 말려 다림질했었다. 그걸 간밤에 옷걸이에 걸어 뒀었다.
내년 1월에 시댁 형제들 내외(총 12명)가 해외여행을 간다. 그때 입을 패밀리룩으로 여자용만 총 6개다. 구김이 가지 않게 옷 가게에서 진열하듯 잘 접어 보관해야 한다. 아휴, 신경을 쏟으며 면티 6장을 개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겨우겨우 예약해 둔 토마토를 아침에 가지러 가기로 했는데... 맘이 점점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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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비닐하우스가 즐비해 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마토, 양파, 감자, 대추 방울 등을 판다고 적힌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간판에 검정 글씨로『양희네 농장』이라고 적혀있다. 전국 어디나 택배 가능하단다. 물론 연락처도 두 개나 있었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 비닐하우스 안쪽으로 들어가 봤다. 몇 사람이 수선스럽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예요?"라는 내 질문에,
"만 원, 이건, 이만 원."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짧게 답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을 할까? 아무튼 흑방울토마토 한 팩, 토마토 한 봉지를 샀다. 현금이 없어서 박스 쪼가리에 유성 병매직으로 큼직하게 적어놓은 계좌로 입금했다.
"띵동~"
"입금됐어."
'허참, 왜? 반말하시냐고요?'
아무튼 그렇게 토마토를 샀었다. 사실, 로켓프레시를 이용하면 당일에, 혹은 이튿날 새벽에 신선한 과일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30년 넘게 이용하는 단골 과일가게가 있어 전화만 하면 곧바로 배달이 온다. 요즘 잘 나가는 과일, 제일 맛있는 과일을 달라고 하면 그냥 과일가게 주인장이 알아서 챙겨 온다. 그래서 과일을 굳이 사서 내 손으로 들고 올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산책길에서 토마토를 산 건 처음이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는 토마토였다. 수돗물에 잠깐 담가 두었다가 식초물로 소독하여 잘 씻었다.
"이 사람들이 토마토에 소금물 주입하는 주사를 준 건 아니겠죠? 간이 딱 맞아요.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을까요? '짭짤이 토마토' 맛이 나네요? 비결이 뭘까요?" 토마토 과즙이 입안 가득한 채로 내가 말했다. 어릴 때는 닝닝한 맛에 토마토를 먹지 않았었는데...
"오메, 겁나 맛있네. 이런 토마토는 첨이네. 다음에 또 사 오세."
남편은 토마토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말했다. 그날은 식빵 한 조각과 치즈를 곁들여 토마토로 저녁을 대신했다. 그날 이후로 산책길에 그 비닐하우스를 힐끔힐끔 보게 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 '꽃' 일부)
이 시처럼, 우리가 그 비닐하우스를 알기 전에는 그곳은 다만 하나의 비닐하우스였을 뿐이었다. 몇 년을 지나다녔지만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산책을 나설 때마다 짐짓 양희네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하루이틀, 양희네 검정 사립짝이 열린 꼴을 볼 수가 없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봐요. 아무래도."
"별 일 아니어야 할 텐데, 워낙 세상이 흉흉해서."
걱정 인형처럼 생면부지인 양희네 가정사에 대해 별 걱정을 다 하며 산책길을 오르내렸다. 토마토를 또다시 사고 싶어서 입간판에 있는 연락처로 전화했다. 제발 별일 없기를 바라는 맘으로 휴대폰 신호음이 가는 동안에 약간 떨렸다.
"네에, '양희네'입니다."
요즘 한창 핫한 인터넷 방송인 유튜버 이명화(랄랄) 모습을 닮은 양희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보지는 않았지만 양희네가 휴대폰을 귀 언저리에 대고 외치듯 말하고 있는 폼이 상상됐다.
'휴우, 다행이다. 별일 없나 보다.' 일단 맘이 놓였다.
"토마토 좀 사려고요. 요즘 계속 문이 닫혀 있더라고요."
"아, 우린 원래 아침에 그냥 깡그리 엥꼬 나버려. 토마토를 사려면 전날 미리 예약하고 아침 8시경에 와야 돼. 9시쯤이면 떨이도 없어."
"어? 얼마 전에 우린 오후에 토마토를 샀는데요?"
"아, 그때는 내가 택배 탁송하러 잠깐 하우스에 나갔던 거고, 때마침 주문자가 노쇼 하여 재고가 남아 있었던 거지."
아, 이 아줌씨는 반말이 버릇이네. 그래도 싫지 않은 건 뭐지? 고향 아짐 같이 푸근하다. 그런데 어쩌지? 오전 10시에 약속이 있는데 아침부터 토마토를 사러 나가게 되면 약속에 늦지 않으려나?
우여곡절 끝에 예약 주문이 되어 다행히 토마토를 다시 구입할 수 있게 됐다. 토마토를 담아 올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에잉, 공동현관문을 여는데 러브 버그 잔해가 가득하다. 섬찟했다. 간밤에 생을 마친 것들이 저렇게 많은데도 여전히 쌍쌍이 달라붙어 한 몸으로 날아다니는 녀석들이 공중에 가득하다.
https://youtu.be/MI6Rj5bdZzw?si=B1iHBBwI90U5uqOu
(계양산은 우리 동네에 있다ㅠㅠ)
나무에도, 담벼락에도, 러브 버그가 까맣게 달라붙어있다. 재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됐는지... 온몸이 근질거린다. 유난히 모기에 잘 물리고 한 번 물리면 퉁퉁 붓는 피부라 러브 버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진저리 쳐졌다. 그것들이 스치기만 해도 가려운 것 같았다.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서는 러브 버그와 관련하여 연일 안내 방송을 해댔다. 러브 버그는 7일살이 정도 된다고 했다. 아무튼 좀 견디면 괜찮을 것이니 안심하라는 말과 익충이라고 말을 강조하며 방송했다. 그러면 뭐 하나? 암수 한몸처럼 붙어 다니며 한 번에 수백 개의 알을 낳는다는데...
양희네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하늘은 사흘 저녁을 굶긴 시어머니처럼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다. 비가 곧 내릴 모양이다. 양희네에 도착하니 벌써 아침에 수확했던 물량은 다 나가고 없었지만 주문해 둔 토마토라 어렵잖게 두 봉지나 샀다.
"이것도 잡숴 봐. 오이가 여간 맛있어."
양희네는 꼬부라진 오이를 잔뜩 백팩 속에 집어넣어 준다. 아, 또 반말. 어쩌면 내가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을 수도 있겠구먼.
토마토 한 봉지와 덤으로 받은 오이는 백팩에 담고 다른 한 봉지는 손에 들었다. 등도 무겁고 손에 든 것도 무겁다. 이게 무슨 고생이람. 사서 고생한다는 말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거다.
10시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가쁘게 걸어오는데 길가 벤치에 앉아있던 몇 분이 말을 건다.
"얼마 주셨수? 오메, 토마토 씨알이 겁나 굵네."
웃기만 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말을 섞다 보면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맘이 급한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굵은 비는 아니었다. 약속 장소에 나가려고 미리 화장도 했는데... 바쁠 땐 오히려 일이 꼬이는 징크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서두르자.
빨리 걷기에는 자신 있어서
킥보드 속도만큼 빠르게
와다닥 걸었다.
P.S. 알립니다. 오늘 맴버십 버튼을 누르고 발행했는데
취소가 불가능하여 다시 글을 재발행합니다.
이미 '라이킷' 누르신 분들과 댓글 남기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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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버그
#간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