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삶이 마지막이라면.#1

유언장으로 쓴 삶의 고백 , 그리고 지금의 후기

by 오늘따라유난히

#2020-05-15

#2025-08-14 19:15


"삶은 살아가는것이 아니라 죽어가는것이라고"

이 이야기를 농담으로 듣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했지만, 너무 오래 하였나, 힘들 때는 가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말이다. 열심히 살아가는게 생물학적으로는 죽어가는거라니 돌이켜보면 슬프다.


헤어짐이나 이별따위 것들,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을 준비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양하다. 누군가는, 시작에서 끝을 생각하고, 과정에서 결말을 그린다. 그렇게 되면 예상되는 슬픔이나 이별 등은 그려왔던 그림이라 무언가 익숙한 체취가 난다.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후유증이 덜하다랄까. 아니면 최초에 선택한 것이니 후폭풍도 책임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사는 방식은 역시 나의 방식이다.

그 반대의 자세라고하면 경험론적인 자세인것 같다. 그렇게 될줄 몰랐지만. 우리는 잘 될줄 알았지만.등의 식으로 긍정주의자가 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기쁨과 슬픔의 양극성을 최대로 겪는다랄까.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는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여러 개중 한개의 자세가 옳은 것처럼 그럴듯하게 설명할때가 있었지만.


언젠가부터는 유언장을 남겨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자꾸 불안해질때, 내가 가끔은 삶에 자신이 없을 때, 또는 내가 너무 엉망이라 도망치고싶을 때 이런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어차피 삶은 죽는거라고 하니, 부담없이 써볼까 라는 자세로 글을 시작하며, 법적인 효력따위 것들보다는 마지막 남기고 싶은 글을 쓴다.


유언장


그 동안 내옆에서 깊은 우울과 채워지지 않은 외로움을 달래주느라 고생했다.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감사한다. 어렸을때부터 가지고 있던 불안과 공황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이십대를 살아내어 삼십대까지 도착했다. 여기까지 걷는데에 나의 잠깐이나 혹은 평생, 주위에 애써주었던 모두에게 고맙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살아간다는게 항상 버거웠다. 나의 유년기를 지나 성인까지 항상 2명이상의 몫을 해야했다는것이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언가 모자르거나 부족해서가 아님을 말하고 싶다. 그렇게 살아온것은 나의 선택이었으며, 그것들로 인한 책임의 감정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말라. 나는 당신이 슬퍼하는 것을 보려고 그렇게 고생하였던게 아닐테니. 나의 의중이 묻어나지 않을까봐, 걱정하여 단언컨대 이야기한다. 나의 삶은 누군가를 도와주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배려하였으며, 나는 힘들 때, "남들을 위로를 하는 나"를 좋아했다. 또한 너무 무겁지 말아달라. 어차피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아니겠나. 그리하여 너무 빨리 올 생각도, 너무 도망치려도 하지말아달라. 남은것들을 위한 기도와 , 떠나는 것들을 위한 기도로 채워달라.



이 글을 보고있는 모두에게

제가 살아있을 때 대부분 주위 사람들에게 평가는 착하다라는 평가였어요. 그게 요즘엔 나쁘게 해석되기도 하지만, 저는 선함이라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된다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은 저를 알거나, 혹은 알았거나, 혹은 알고싶었거나 일테니까.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마워요. 혹시라도 저를 아는 사람이 저로 인해 슬퍼한다면, 잘 다독여주길 바랄게요. 그분들이 슬퍼하는게 저의 목적이 아닐테니까요. 마지막이라고 하니 왜 자꾸 고맙다는 이야기만 생각나는지. 저는 힘듦이 종류와 주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주 다른 힘듦의 종류가 저를 찾아와 삶을 못견디고 못살게 굴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있었어요. 그게 잠깐 스쳐간 인연도, 그리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도, 그리고 선의나 배려를 베풀었던 사람도. 그래서 결국엔 그 힘듦이 지나갔고, 잘 버텨냈습니다. 그게 언제라도 설명하고 싶지만, 마지막 떠나는 사람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건 불안과 미안함을 남기는것 같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여러분, 이 글을 보시고 저의 마지막을 지켜봐주시게 된다면, 저를 아껴주는 분들에게 저는 좋은사람이었다고, 고마웠다고, 해주시면 하는 마지막 욕심이 있네요. 마지막 부탁이니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나의 친구들에게

항상 나의 옆에서 고민과 불만을 들어주었던 친구들아, 항상 고마웠다. 나의 죽음이, 너희들의 너무 긴 삶을 슬픔으로 채우질 않길 바란다. 가끔 회상하며 아 그때 그 좋은 친구가 있었지해라, 존재하지 않는 나를 챙기려 나의 무덤이나 납골당을 가지말아라. 혹시라도 여유가 된다면, 남아있을 나의 가족들을 챙겨주길 부탁한다. 혹시라도 내가 떠났다고해서, 과거에 큰 잘못 혹은 사소한 말이나 다툼속에서 미안함을 찾지 말아달라. 너도 완벽하지 않았겠지만 나도 완벽치 않았다. 그러니 너무 마음쓰지 말길 바란다. 대신 그 과정을 통해서 성장했음을 깨닫길 빈다. 적어도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아픈만큼 성숙했으니, 앞으로도 점점 나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자신감으로 채워가길 바란다.


나의 친구들아, 그 동안 나는 잘살았다고,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 가끔은 얼마나 더 완벽해져야하나, 부담을 갖은적도 있었어. 그러니 날 너무 미워하거나, 고마워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해. 어떤 삶은 삶은 사는게 아니라 살아지게 끔 하거든. 어떨 때는 삶은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 같지만, 어떨 때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신의 변덕에 고생하는것 같기도 해. 그러니 나의 삶이 너희들에게 밑거름이 되어서, 아 저런 삶도 있었지. 라는 정도만 남길 기도할게. 덕분에 짧고 긴 시간, 울기도하고 웃기도하다 떠난다. 남은 너희들이 조금 걱정이긴하지만, 다들 본인들의 인생을 잘 헤쳐나가고 있으니, 앞으로도 잘하리라 믿는다. 혹시라도 힘든 날이 온다면 서로가 서로를 만나 가끔은 묵묵히 들어주고, 가끔은 좋은 얘기로 서로 성장해나가길 기도할게. 돌이켜보면, 너희들이 더 잘되고, 더 좋은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에 부담도 주고, 잔소리도했어. 그래서 돌이켜보면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진 못하고 자꾸 바꿔놓고 싶었거든. 그게 오랜시간 동안 미안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얘기도 소주한잔에 같이 털어버리길 바래. 너희들에게 인상깊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떠나는 사람이 그러면 안될테니까. 잘지내라, 계속 지켜보고 있을꺼야. 그러니 나쁜 일, 혹은 속상한 일이 있으면 어디서든 얘기해. 난 어디서든 듣고있을테니까. 아들과 딸들의 아들과 딸들까지 보고 오길 바란다. 그래서 인생을 한바퀴 살아내고, 다음 단락에서 만나, 다시 만나자. 그때는 두번째일테니까 나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겠지. 정말 마지막 안녕이야. 고마웠다.



나의 엄마에게

엄마, 그동안 항상 고마웠어. 호강시켜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게 되네. 기억이 나는지. 어렸을 때 엄마에게 "엄마가 떠날 때까지 마음의 준비가 될때까지 오래살아줘" 라고 부탁했던 나의 열살이 엊그제 같은데. 그 마음이 20년 넘게 나의 마음속엔 남아있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의 삶보다 엄마가 행복하길 바랬거든. 가끔은 돈이 없지만 생활비를 드리려고 대출을 받은적도 있었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가 너무 미안해하겠지만, 그만큼 무관심한, 쌀쌀한 둘째는 아니었다고 기억이 남아주길바래서 이렇게 말하고 가네.

엄마, 사랑해, 나는 다음 생에 태어나도 엄마 아들로 태어날래. 그럴러면 엄마가 또 아빠를 만나야하나. 그러기엔 엄마의 젊음이 조금 불행할 것 같아서 그건 조금 마음이 걸리지만 그래도 엄마는 현명한 사람이니까 다시 그때가 온다면 어떤 선택을하든 응원할거야. 말하지는 않았는데 생각보다 내가 좀 빚이 있지. 한 오천만원 되려나. 사업한다고 생겼는데, 이걸 다 갚으면 엄마 집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항상 열심히 살았어. 효도를 돈으로 하려고했다니 지금생각하니까 우습다. 여행이라도 한번 더 같이 다니고, 좋은얘기 해줄걸, 나 키운다고 삶을 쉬는데 쓰지못하고 의무감으로 얼룩진것 같아 그게 항상 미안했어.

엄마, 내가먼저간다고해서 바로 따라오진 말아줘, 나도 나의 선택이 아닌것으로 먼저가게 되었지만, 엄마도 더 좋은것들을 보고 왔으면 좋겠어. 너무 슬퍼하진 마, 그러면 멀리있는 나도 슬퍼서 자꾸 비가 내릴지 몰라.

그리고 기회가 되면 화분이나 나무를 좀 키우는게 좋겠어. 그걸 보면서 식목일에 태어난 나라고 생각하면 자그만 위로가 되지 않을까. 내가 생각나는것들은 많이 챙겨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디서 읽었는데, 슬프면 이것저것 찾아서 슬퍼진대. 그러니 나의 것들을 보고 슬퍼하지 않길, 나는 어렸을때부터 웃고있는 엄마가 너무 보고싶었거든. 못해준게 없다고 생각 안했으면 좋겠어. 내가 받은걸 설명하려면 이 글 하나로 한참은 모자를테니까.

나는 좋은 가족을 만났고, 좋은 아들이 되어서, 성공했어. 그러니 과거의 일들이 슬픔이 되지 않길.

지금 생각해보면 가끔은 떼도 쓰고, 신경질도 내고 그럴걸. 내가 그래야 엄마는 엄마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것만 같아. 그치만 너무 마음 쓰진 말아줘, 내가 과묵한 사람이라 말을 너무 하지 않은거야. 다른것들은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가끔 가족들이 못살게 굴고, 답답해도 잘 이해해줘. 우리가족에 우리 엄마가 제일 현명하니까.


엄마, 나는 할머니 돌아가시는 날 곡 놓아 우는 엄마를 보고나서 나는 슬펐어. 나의 마지막에는 너무 슬퍼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언젠가 우리는 다시만날테니까. 그때 우리 다시 만났을 때 그래도 열심히살았다고, 후회가 없었다고, 그때 만나면 어려운거 힘든 것은 두고, 즐거운것만 찾아다닐 수 있으니까. 너무 빨리오진말았으면 좋겠어.



#2025.08.14


#1. 고백

5년 동안, 삶이 너무 힘들때마다 이 글을 보며, 울곤했다. 아니면 울고있다가도 글을 보곤 했다. 오히려 글 자체는 유언장이라기 보단 살고싶다는 울음이었겠다. 나의 생시가 누군가에겐 어두움으로, 어떤이에겐 위로처럼 들리겠지만, 오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날이다. 오해와 선해는 독자에게 남겨둔 채로.


#2. 색의 죽음

우울한 글을 다시 읽는건 타의에 의한 퇴고같다. 몇번의 계절을 지나 글자가 바뀌기도 하고, 단락을 지울까도 고민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내삶의 초고는 순수나 감정을 수단을 핑계로한 날것의 우울이다 싶다.

올해는 "삶이 마지막이라면#2" , "혹은 삶이 마지막에" 를 쓸 뻔 했다. 예전의 나는 더이상 내 삶에 방향과 속도, 삶의 신념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더이상은 변하지 않을것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뒤돌아보니 모든게 바뀌어있기도 했다. 영원함의 바람이 찰나의 반짝임으로, 아주 검고 붉은 나의 사유가 누군가에겐 적당히 다르다는 가벼움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주위가 달라짐을 느낄때면, 나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부턴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덕이나 윤리에는 긴 시간의 논리를 포함할 순 없는 걸까.


#3. 좋아하는 가삿말

글을 발행할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우울이나 결핍, 부정으로 성장하는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는 기분이다. 그럴때마다 썻다가 지울까를 고민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곤 했다. 글을 기록하기 전의 삶은 좋은 말을 모아두는게 습관이었기에.


썻다 지운 말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하마터면 모아다가 또 하날 낼 뻔했지 뭐야.

그 낱말들 안이 얼마나 빨갰었던지 꺼냇다면 아파하다 또 나만 죽었을거야.

그리오- 방안에 (1:23)


이전 16화#16. 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