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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은 왜 있을까?

진화생물학이 밝히는 '할머니의 힘'

by 갱년기에say
폐경은 노화인가?

“왜 엄마는 더 이상 아기를 낳지 않아요?”


한 아이의 질문에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러나 현대 여성들은 출산 이후에도 더욱 활동적이며, 때로는 인생의 ‘두 번째 절정기’를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폐경을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외모가 중요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젊음’이 찬양되고, 중년 이후의 여성은 외모적 압박 속에 놓인다. 이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화장품, 시술, 수술 등에 많은 비용을 지출하며 폐경과 노화를 ‘관리’하려 한다. 한 연구에서는 다산 여성보다 자녀 수가 적은 여성이 중년 이후 더 매력적으로 평가된다는 결과도 나왔다.


의학용어인 폐경(閉經)의 폐(閉) 자는 ‘닫다’나 ‘막다’, ‘가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혹자는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발생한 현상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수명연장흔적가설; Lifespan artifact hypothesis), 왜 남자에게는 없는 이런 현상이 여성에게만 있는지 자연스러운 의문이 든다. 현대에 살고 있는 수렵채집인들을 대상으로로 연구한 결과를 살펴보면 현대 문명이나 의학의 혜택 없이도 질병이나 사고를 피하여 장수한 인간 여성은 폐경 이후 수년에서 수십 년을 살아가기 때문에 폐경이 단지 노화로 인한 결과라고 하기에는 다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여성은 태어날 때 약 100-200만 개의 난자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배란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15세부터 50세까지 매달 생리를 한다고 가정하면 35년간 총 420개의 난자만이 사용된다. 생리주기 때마다 여러 개의 난자들이 배란경쟁에 뛰어드는데 이 중 한 개의 난자만 배란에 성공하고 나머지는 자연소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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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난소기능은 태아시기인 임신 18-22주에 최대치(100%)에 도달하고 출생과 함께 감소하기 시작한다. 여성이 30세가 되면 12%의 난소기능이 남고 40세가 되면 단지 3%의 기능만 남는다. [1]


매달 10~15개의 난자가 소진된다고 해도 약 6천 개의 난자가 사용되는데 그럼 나머지 난자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태어날 때 약 100만 개이던 난자의 수는 사춘기가 되면 약 30-40만 개로 감소하고 35세 이후에는 난자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50-51세가 되면 약 1000개의 난자만이 남는데 그 이유는 아직 잘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신체의 노화와 상당히 다른 패턴이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노화가 아닌 계획된 난소 기능 상실(programed ovarian failure)로 설명한다.


폐경 연령은 유전적 요인을 포함한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지만 폐경의 평균 연령은 인종 간 큰 차이가 없고 최근 수십 년 동안도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초경 연령이 문명의 발전이나 영양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이는 폐경이 현대인의 수명증가로 발생한 현상이 아니고 먼 옛날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특성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놀랍게도 자연에서 폐경 후에도 오랫동안 살아가는 동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동물은 생식 가능 나이와 수명이 거의 일치한다. 예외적으로 범고래와 짧은 지느러미파일럿고래도 인간처럼 폐경 이후 긴 생애를 살아가는 동물이지만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는 폐경이 없다. 침팬지의 한계 수명은 50세 정도지만 40세의 침팬지의 절반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침팬지처럼 진화했다면, 70대에도 출산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 고래와 인간은 왜 죽을 때까지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위해 학자들은 고래 사회를 관찰하였다.


범고래는 모계사회이고 폐경한 암컷들이 무리의 생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새끼 범고래는 성체가 된 이후에도 어미와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대가족을 이루며 최대 4세대가 함께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만약 어미가 죽게 되면 어른 범고래라 할지라도 1년 내에 암컷 범고래는 2.7배, 수컷 범고래는 8배 더 높은 확률로 사망하였다. 연구자들은 어미가 살아 있는 것이 새끼뿐 아니라 어른 범고래에게도 큰 이점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경험 많은 할머니 범고래들은 생태적 지식을 축적한 존재로서 무리를 이끌고 먹이를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는 무리 전체의 생존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바로 이런 관찰로부터 생긴 것이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다.


이 가설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의 신체 수명보다 난소 수명이 짧은 이유는, 즉 폐경이 발생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식을 포기하고 딸과 손주의 생존을 돕는 것이 진화적으로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진화가 우리에게 건넨 위로,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


갱년기 진단을 받은 은영 씨 (가명, 55세)는 “내가 이제 할머니가 되는 것인가요?”라는 물음을 던졌다. 월경이 끝난 지 1년이 넘었고, 안면홍조와 불면, 관절통 같은 증상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나는 더 이상 여성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폐경을 마치 ‘인생의 종착역’처럼 느끼는 그분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부터가 훨씬 중요한 시기예요. 폐경은 끝이 아니라, 인간 여성만이 가진 특별한 진화의 흔적이에요.”


그때부터 나는 이 환자분께,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폐경은 결코 실패가 아닌 전략’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왜 인간 여성만 폐경을 겪는 걸까?


왜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는 생식을 계속하다가 죽는데, 인간 여성은 생식이 멈춘 후에도 수십 년을 살아가도록 설계되었을까?

침팬지와 인간은 약 600만~700만 년 전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 유전자 상으로도 인간과 침팬지는 98.8%나 일치한다. 인류와 침팬지의 공통조상은 아마 생식 가능한 나이와 수명이 거의 일치했을 것이다. 즉, 생식을 멈추면 곧 죽는 구조였다. 현재의 침팬지도 그렇다. 암컷 침팬지는 폐경 없이, 마지막까지 생식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어느 시점부터 ‘생식이 멈추는 데도 계속 살아가는’ 즉, 폐경 이후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우연히 오래 살게 된 여성들


모든 것은 작은 변이에서 시작된다. 환경 변화, 도구 사용, 협력적 공동체 구조, 불의 활용 등으로 인해 어떤 인간 개체들은 외부 천적이나 질병, 사고로 죽을 확률이 줄어들고, 더 오래 살아남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당시 인류의 평균 수명이 30~40세였지만, 일부 여성은 50세를 넘기게 된다. 하지만 난소는 그 수명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여 어떤 여성은 살아있는 동안 난소 기능이 먼저 멈추고,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못하지만 생존하는 상황이 생긴다.


자식 대신, 손주를 돌보는 여성


생식이 멈췄지만, 이 여성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늙어간 게 아니었다. 이들은 자기 자녀의 자녀, 즉 손주를 돌보는 데 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영유아기가 긴 인간의 특성상 인간 아기들은 돌봄 없이 혼자 살아남기 힘들다. 어머니가 채집이나 육아로 지치면, 경험 많고 신체 활동이 여전히 가능한 할머니가 나선다. 할머니는 자식을 더 낳는 대신, 이미 태어난 손주의 생존율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이 속한 가족은 아이의 생존율이 더 높았고, 그로 인해 자손을 더 많이 남겼으며, 이들의 유전적 특성 – 즉 폐경 이후에도 생존하는 특성이 진화적으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진화의 어느 시점부터 인간 여성은 아이를 낳지 않게 된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유인원처럼 생식이 멈췄으면, 생명도 곧 끝나야 하는 게 자연의 섭리인데 인간은, 아니 인간의 할머니는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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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설을 우리는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실제로 탄자니아 북부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하드자족(Hadza) 여성들을 관찰하면서, 할머니가 손주들의 생존과 자녀의 생식 성공률에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드자 여성은 폐경 후에도 활발히 사냥과 채집에 참여한다. 특히 고구마 같은 뿌리 작물을 캐는 데 능숙한데, 이들이 가져온 식량은 딸이나 며느리의 아이들, 즉 손주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즉, 할머니가 살아 있는 집단일수록 어린아이들의 영양 상태와 생존율이 높아지는 것이다.


적게 먹고, 더 많이 나누는 존재


할머니들은 젊은 성인들보다 적은 양의 식량을 필요로 했다. 그 이유는 폐경 이후 기초대사량(Basal Metabolic Rate)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기초대사량이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 양으로 휴식 상태에서 소모하는 에너지의 양을 말한다. 에스트로겐은 미토콘드리아 기능을 조절하고 에너지 소비를 자극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폐경 후 에스트로겐이 감소하면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가 감소하게 된다. 즉, 할머니의 열량 소비 효율이 높아졌고, 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남는 에너지는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할머니는 자신이 덜 먹음으로써, 더 어린아이들, 딸, 손주에게 더 많은 자원을 양보한 셈이다. 이건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다.


기술과 지식의 보고(寶庫), 인간 도서관


할머니는 단지 식량 분배자 역할만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술과 지식의 살아있는 보고(寶庫)였다. 수십 년간의 채집, 식물 구분, 동물 흔적 해석, 도구 사용, 불 피우는 법, 심지어 인간관계에서의 협상과 조율까지 그들은 한 무리의 생존에 필요한 실질적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고, 그 지식을 말과 행동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전달했다.


할머니는 어떻게 인류를 살렸는가


약 25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지구는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라 불리는 급격한 기후변동의 시대를 겪었다. 약 100,000년 주기로 약 11~17번의 대규모 빙하기가 반복되던 혹독한 시기였다. 눈보라와 가뭄, 동물의 이동과 멸종, 식량의 불균형이 반복되던 이 시대에 단순한 힘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때 인간이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바로 할머니들이 가진 생존 기술과 지식, 그리고 공동체적 양육 방식 덕분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육아는 종종 ‘엄마의 몫’으로 여겨지지만, 인간 진화의 역사에서 ‘한 아이를 여러 명이 함께 키우는 방식(공동양육, alloparenting)’은 아주 일반적인 구조였다. 할머니는 육아의 중심 역할을 분담했고, 이 덕분에 젊은 여성은 자녀를 더 많이 낳고, 더 빠르게 다시 임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곧 인구 증가 속도를 가속시켰고, 혹독한 빙하기를 견뎌낸 소수의 인류가 전 세계로 퍼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렇듯 인류진화의 역사에서 폐경은 축복이었다. 생식이 끝나고도 생존하는 여성. 즉 할머니는 덜 먹고, 더 나누고, 더 가르치고, 더 돌보는 존재. 지혜와 기술을 갖춘 인간 진화의 가장 강력한 열쇠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여성들 역시 그 유전적 흔적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폐경은 여성의 끝이 아니라, 인류를 살린 고귀한 전략의 시작이었다.


폐경 이후의 삶도 진화의 일부다


물론 우리가 논의한 ‘할머니 가설’은 인류 진화사 속에서 폐경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지만 그것이 현대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되기는 어렵다. 문명과 의학이 발달하면서 영아 사망률은 매우 낮아졌고, 여성은 예전처럼 많은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더 이상 손자에게 음식을 양보할 필요도 없고, 기초대사량이 낮았던 할머니의 생존 전략은 오늘날 '갱년기 비만'이라는 이름으로 슬픈 유산처럼 남아 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폐경이 무가치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폐경을 생식의 끝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또 하나의 진화적 생존 전략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 공동체를 위한 헌신
✔️다음 세대를 돕는 지혜와 돌봄
✔️ 신체적 생존을 넘어선 문화적·사회적 영향력


이 모든 것은 우리 먼 조상 여성들, 바로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전략이자 유산이다. 그 유산 덕분에 인류는 더 오래 살아남았고, 더 많이 번성할 수 있었으며, 더 깊이 연결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


지금 폐경을 맞이한 우리 세대 여성들 역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할 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리고 사회 전체를 위해 더 넓은 시야로 살아가는 삶. 폐경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당신은 여전히 중심에 있고, 세대를 잇는 힘의 원천이다.


그 누구보다 강인한 존재.
바로, 인간 여성.
그리고 그중에서도 할머니.


바로 당신이다.



참고자료

1. Human ovarian reserve from conception to the menopause. PLoS One. 2010 Jan 27;5(1)

2. The evolution of the human menopause. Climacteric.2019 Apr;22(2):111-116.

3. The Slow Moon Climbs: The Science, History, and Meaning of Menopause Susan Mattern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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