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주 원장 약력
산부인과 전문의
예방의학 전문의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98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석사
한양대학교 의학박사
유투버, 갱여사 TV https://www.youtube.com/@mrs.gangtv
전, 질병관리본부 책임연구원 및 보건연구관 (사무관)
전, 독일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병원 그로스하던 유방암센터 임상수련의
현, 이홍주여성의원 원장(대구 수성구) https://www.drleeclinic.co.kr/
현, 대한산부인과학회 유방진료위원회 위원
현, 직선제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 학술위원
현, 대한산부인과유방내분비학회 상임이사
방송출연
채널A 나는 몸신이다. <천천히 죽어가는 병! 질병코드 'N95.1' 이겨내는 법> 2023년 5월 25일 2023-05-채널A 행복한 아침 <닥터하우스> 1247 회 2023년 12월 8일
MBN 엄지의 제왕 <갱년기! 중년 이후 삶의 질을 좌우한다 편> 2024년 7월 9일
내가 의과대학에 들어가게 된 것은 매우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내내 공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대학교 지원서를 쓰기 직전까지 내가 원하는 전공은 유전공학이었다. 나의 부친은 서울대학교에서 생물학 전공을 하신 분으로 몇 년간 교편을 잡으시다가 당시에는 대입학원에서 입시상담 일을 하고 계셨는데 나의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마지막 모의고사 성적을 보시고는 의대 진학을 권유하셨다. 그 제안을 들었을 때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은 “저는 해부학 공부를 할 자신이 없어요!”였다. 해부학 실습을 해야 한다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꼈지만 지금도 정말 존경하는 나의 부친은 의대 진학을 강권하는 대신 ‘네가 정말 원하는 유전공학을 하고 싶다면 의대 진학이 더 지름길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에 혹하여 의대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의대에서 유전공학을 하는 것이 유전공학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빠른 길임은 사실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의대에 들어가고 나서 임상이 의외로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부학 실습도 생각했던 것처럼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인턴실습을 하면서 처음으로 산부인과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부모님과 상의를 하였으나 막상 그분들은 ‘힘든’ 임상의사가 되는 것을 격렬히 반대하셨다. 자식이 전문 직종에서 안정된 삶을 살기는 원하지만 병원에서 힘든 당직을 서고 어려운 수술을 하는 일은 싫어하셨다. 나의 부친은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임상의학이 아닌 유전학과 같은 기초의학을 하기를 진정 원하셨던 것이다!
인턴 수련을 마치고 예방의학 분야에서 레지던트 수련을 하고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석박사를 하고 보건복지부의 연구관이 되어 일을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임상수련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런 나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그는 내가 여전히 산부인과에 대한 미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30세가 넘은 나이에도 다시 산부인과 수련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이다.
임상 수련을 결심하고 공무원을 그만두자마자 몸과 마음이 편해서 그랬는지 덜컥 임신이 되어버려 임신한 몸으로 레지던트 채용 시험공부를 하러 다녔다. 의학 공부는 물론 토익점수가 필요해서 영어 공부도 했는데 태교로는 매우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2004년 11월에 출산을 하고 다음 해 1월부터 산부인과 수련을 시작했는데 출산한 지 채 100일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첫 3개월 동안 가장 큰 문제는 모유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처음 1년 차 수련을 시작할 때 100일 당직이라는 게 있어서 100일간은 전혀 집에 갈 수 없었다. 당연히 수유를 전혀 할 수가 없었고 너무 바빠서 유축도 제시간에 할 수가 없었다. 필연적으로 나는 유방의 울혈로 고생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산부인과 의사로서 유방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유방은 여성호르몬이 작동하는 기관이다. 생리 주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청소년기의 이차성징, 월경 전 불쾌 장애, 임신, 출산, 유방통 등 여성의 건강 문제에서 빠질 수가 없는 기관임에도 산부인과 의사였던 나는 유방에 너무나 무지하고 취약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유방을 공부하는 것이 부인과 의사의 필수 코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매우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주변에 나를 도와준 분들을 생각한다면 먼저 나를 의대에 보내주신 부모님, 산부인과 수련을 도와준 남편, 그리고 산부인과 수련 기간 중 유방질환과 관련하여 가르침을 주신 은사 조삼현 교수님이다. 조삼현 교수님은 유럽에서 유방암 관련 수련을 하고 오신 분으로 활발하지는 않았으나 꾸준히 유방 진료와 산부인과 진료를 접목하는 일을 해오셨다. 또 나를 참 아껴주신 분이기도 했다. 그분의 가르침 아래 유방에 대하여 잘 아는 것이 산부인과 의사로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는데 산부인과 전문의를 취득한 후 한 번 더 기회가 찾아왔다. 대한 산부인과학회에서 매년 2명을 선발하여 독일의 유방암센터로 유학을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생긴 것이다. 때마침 남편도 독일에서 법학 박사 과정을 지원하게 되어 우리는 같이 뮌헨대에 지원하였다. 남편은 뮌헨대 법학과, 나는 뮌헨대학병원 그로스하던 유방암센터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독일은 산부인과에서 유방질환을 다룬다. 유방암 환자는 산부인과에 입원하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수술을 받는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는 유방암 환자는 항호르몬 치료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나, 유방암 환자에게서 동시에 증가하는 자궁내막암이나 난소암 위험에 대한 관리를 좀 더 긴밀하게 받을 수 있다. 월경 전 불쾌 장애로 유방통이 있는 여성이 월경 전 불쾌 장애는 산부인과에서, 유방통은 외과에서, 각각 따로 진료를 받아야 한다면 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일까? 한국의 현실에서 산부인과 의사가 유방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나는 산부인과 의사가 유방질환 진단과 치료의 일차적 책임을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산모들이 유방의 울혈, 함몰유두, 산후 유선염으로 고통받는 와중에 외과를 가야 하는지 산부인과를 가야 하는지 헷갈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 자신이 이런 경험을 했기에 온 가족을 데리고 미련 없이 독일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외국에서 아들 2명을 키우며 유학하는 것이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임상수련을 위해 독일의사면허가 필요했기 때문에 영어의 토플과 유사한 독일어학시험인 DSH(die Deutsche Sprachprüfung für den Hochschulzugang)도 통과해야 했다. 아이들을 유치원이 맡기고 찾아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독일어공부와 병원 수련과 논문을 위한 실험을 병행하는 것은 눈물이 쏙 나올 만큼 힘들었다. 남편의 응원도 큰힘이 되었고, 중간에 포기할 경우 한국에서 받은 장학금을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1년 반 동안 유방암센터에서 임상 펠로우로서 수련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애초의 포부처럼 유방암 환자를 진료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유방외과 전문의들이 훌륭하게 하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부인과 전문의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자연스럽게 찾게 되었다. 독일 유학을 다녀와서 한양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당시 지금은 고인이 된 김영재 교수가 나를 찾아와서 자신이 개업을 하려 하는데 유방 진료와 부인과 진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를 구하고 있으며 그 적임자가 나라고 말했다. 나도 힘들게 독일에서 배운 지식을 썩히기 싫었기 때문에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의대 입학 후 예방의학을 포함하여 무려 20년간 맴돌았던 한양대 울타리를 떠나 강호로 나가게 되었다.
개원가에서 부인과 진료를 하면서 내가 호르몬 치료 상담에 매우 적합한 인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호르몬 치료 상담을 하는 거의 모든 환자들이 유방암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폐경 후 호르몬 치료(menopausal hormone therapy;MHT)와 관련해서는 유방암과 관련한 상담이 절대적이었다. 갱년기가 시작되는 나이가 40~50대인데 이 시기에 유방암 위험도 증가하기 때문에 환자들은 갱년기로 인한 고통을 없애는 동시에 유방암 위험도 없기를 바란다. 나는 산부인과 의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산부인과 단골 환자이기도 했으므로 호르몬이 여성에게 주는 고통과 호르몬치료가 여성에게 주는 이익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31세와 35세에 유도 분만으로 출산을 했고 조기진통, 난산으로 인해 두 아이 모두 신생아 중환자실에 보내야 했으며, 함몰유두 때문에 모유 수유 시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고, 갑작스러운 단유로 인해 유방울혈이 발생하기도 했다. 산부인과 레지던트 수련 중에 둘째를 출산하면서 다시 모유 수유에 도전했지만 편평 유두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2번의 분만 동안 총 3개월의 모유 수유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고야 말았다. 독일 유학을 위해 출국하기 직전에 유방검진을 받았을 때는 섬유선종이라는 양성종양을 진단받아 소위 맘모톰이라고 하는 흡입식 유방절제술을 받았다. 출산 후에는 월경 기간이 길어지고 월경통도 심해지고 월경량이 많아지는 등의 생리불순 증상이 발생했는데 동료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아도 모두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자궁선근증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해서 동료의사에게 자궁적출술을 해달라고 했다. 40세가 되기 전에 자궁적출술을 결심하는 것은 아무리 의사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고통이 컸기 때문이다. 일단 월경을 하기 일주일 전부터 몸이 아프다. 등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아랫배도 아프다. 그러면 월경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다 월경이 시작되면 엄청난 통증과 함께 어마어마한 양의 출혈이 시작된다. 그 출혈은 약 1주일간 계속된다. 처음 하루나 이틀 정도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수액을 맞아야 했다. 아마 병원 직원들이 모두 내 월경 주기를 알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게다가 월경 주기는 쓸데없이 정확해서 한 달 중 일주일은 월경 전 불쾌 장애로 고통받고 일주일은 월경통과 빈혈로 고통받았다. 동료 의사들은 내 자궁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으면서도 내가 수술을 결심했을 때는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기꺼이 도와주었다. 수술 후 최종 진단은 나의 예측대로 자궁선근증이었다.
이런 모든 일들을 겪는 과정 중에 발생 가능한 모든 부인과 질환들은 자연스럽게 잠정적인 나의 미래의 문제로 여겨졌고 폐경도 그중 하나였다. 앞으로 다가올 이 문제에 대비하기 위하여 나는 더 안전한 치료법, 특히 유방질환과의 관련성에 대하여 다른 어떤 분야보다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영남대학교에 교수로 가게 되면서 2016년에 대구에서 갱년기 클리닉을 개업하게 되었는데, 이곳에 내가 1992년 의과대학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역량이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방의학 수련 경험, 보건복지부 공무원 시절의 행정경험, 산부인과 전문의 그리고 유방암센터에서의 유방질환 수련 경험을 모두 망라한 진정한 부인과 갱년기 클리닉을 목표로 하였다. 대구에 지인이 단 1명도 없는 상황에서 개업을 한터라 처음에는 고전을 하였지만 갱년기 전문진료를 원하는 여성들의 입소문으로 우리 클리닉의 경영상태는 해를 더할수록 좋아지고 있다.
갱년기 클리닉을 시작하고 약 3년 정도 경과하였을 무렵인 2019년 내가 우려하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다. 나에게 갱년기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로써 나는 마침내 부인과 질환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말았다. 산부인과 단골 환자로서의 위상답게 나의 갱년기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평균보다 무려 5년이나 빨리 찾아왔고 증상도 매우 심했다. 이후 3년은 예전 자궁선근증으로 인한 고통을 연상하게 하는 악몽 속에서 보냈는데 만약 내가 갱년기 클리닉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 시기를 견뎠을까 생각했을 때, 갱년기클리닉을 방문하는 환자 한 명 한 명을 모두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논문과 의학 서적을 읽고 갱년기 진료를 하는 것과 내가 그것을 경험한 이후의 진료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말로 이루 다 표현하기 어려운 괴상한 증상들이 나를 덮칠 때마다 환자들이 나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나면서 “아 그 말이 이 증상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마치 큰 깨달음을 얻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 유레카를 반복해서 외치게 된다.
나의 갱년기 클리닉은 2019년을 기점으로 이성과 감성과 공감이 만나는 어떤 변곡점을 지났다고 느낀다. 나를 찾아오는 갱년기 여성들을 더 이상 환자가 아닌,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겪였던 많은 우여곡절들, 좌충우돌 살아온 인생 여정이 오늘 나와 만나는 갱년기 여성들과 공감하고 고통을 나누고 함께 미래를 건설하라는 사명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숙명 같은 것을 느낀다.
갱년기 클리닉의 미래는 매우 밝다. 내가 처음 갱년기 클리닉을 시작하던 2012년에는 여성 스스로 갱년기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었고 호르몬은 마치 유방암을 일으키는 발암물질처럼 여겨졌다. 갱년기 증상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내원하면 내가 먼저 제발 호르몬 치료를 받으라고 사정사정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갱년기를 진단하고 이를 교정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한다. 그동안 호르몬약도 많이 개선되었고 호르몬 이외에 다양한 기능 식품과 운동 명상 등 다양한 도구들이 있다. 문제는 다양한 갱년기 문제가 존재하고 그보다 더 다양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각자에게 적합한 길을 찾아주는 적당한 길잡이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개 자신이 속한 그룹 안에서 정보를 얻는데 해당 그룹의 동료들, 소위 언니 동생들이 제대로 된 길잡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대개는 편향된 정보를 얻는 경향이 있다. 그룹 내에 호르몬 치료에 긍정적인 동료가 많으면 부적절하게 호르몬 치료를 고집하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호르몬 치료를 잘 받고 있다가도 주변 동료들이 호르몬제 부작용에 대하여 걱정하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아 치료를 포기하기도 한다. 만약 이 여성들이 여성호르몬과 유방의 생리를 잘 아는 전문가를 친구처럼 만나서 편하게 고민을 상담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더 높은 의료의 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갱년기를 치료하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갱년기 여성들의 동료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상 언니 동생의 입장으로, 또는 딸이나 조카의 입장으로 그들에게 일일이 자상한 조언을 하기에는 진료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내가 처음 개업을 해서 환자가 거의 없었을 때는 그것이 가능했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밖에서 기다리는 환자들과 그들에게 시달리는 직원들의 원성을 사게 된다. 앞으로 갱년기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하여 동료로서 전문가로서 갱년기 선배로서 나의 경험과 전문지식을 총동원하여 애정 어린 권고와 충고, 때로는 나의 경험담을 여기에 풀어보려고 한다. 이것이 우연히 의과대학에 가서 우연히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고 우연히 유방암 공부를 하고 우연히 갱년기 클리닉을 하게 된 나의 행운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나를 만나는 모든 갱년기 여성들이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나를 만나는 모든 갱년기 여성들이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나를 만나는 모든 갱년기 여성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