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뉴욕시티 마라톤 3주 전.
그리고 뉴욕시티 마라톤의 최종 모의고사라고 하는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 대회날이다. 마라톤을 위해 훈련해온 러너들이 이번주에 대부분 피크를 맞이하기 때문에 코스가 험난함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굉장히 잘 나오는 대회다.
뉴욕시에서 유일하게 지하철로 연결되어있지 않은 지역이라서 배를 타고 대회장으로 향한다. 작년에 한번 뛰어본 대회라고 나름 익숙하게 짐을 맡기고, 시리얼바를 먹고, 따뜻한 물을 마신 다음 천식 호흡기 치료제를 두번 흡입하고, 마스크를 고쳐쓰고 출발선 앞 대기구역으로 들어갔다.
천식이 너무 심해 하프마라톤을 뛸 때가 아니었지만 뉴욕 5구 그랑프리 마지막 대회를 포기할순 없었다. 내년 뉴욕마라톤 참가권을 위해 반드시 참가해야하는 9개의 대회 문제도 있었다.
찬공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웜업이 될때까지는 마스크를 쓴채로 달려야했다. 호흡기 치료제는 기침이 발작적으로 왔을때 쓰는거지만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무 증상이 없어도 두번 흡입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평소 하프마라톤보다 빠르게는 커녕 훨씬 느리게 출발했다. 반환점을 지난 후에는 거의 출발1그룹의 맨 끝까지 뒤쳐졌다. 퍼포먼스가 좋았던 작년이었다면 ‘어디 내가 감히 꼴찌를!!!’ 이라고 분노하며 앞으로 치고 나갔겠지만 그땐 나도 젊고 건강하고(?) 아직 덜 겸손했었다.
지금은 속도를 낼때가 아니다. 기침으로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뛰는것만으로도 훌륭한 레이스다. 오늘만큼은.
나는 달리기 친구들이 꽤 많은 편이다
그래서 대회를 가면 익숙한 얼굴들을 만난다. 스테튼 아일랜드 하프처럼 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일때는 맞은편 러너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에 서로 인사도 하고 화이팅을 주고받으며 뛴다.
오늘은 내가 평소 하프마라톤을 가면 목표로 하는 페이스보다 훨씬 느린 페이스로 설정하고 뛰었다. 그렇다고 “설렁설렁”은 아니었다. 훨씬 느리게 뛰고있는데도 숨이 찼다.
한참 뛰다보니 이렇게 느리게 뛰고있는데도 간혹 몇몇의 러너를 제치고 나가곤 한다. 로드러너스의 대회는 기록순으로 줄을 서서 출발하기 때문에 나보다 앞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과거 2년 이내에 나보다 좋은 기록을 갖고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간간히 몇명을 제친다.
대회를 나가면 꼭!! 나보다 앞에 있어서 늘 등짝만 보고 뛰던 친구가 있는데, 오늘 뛰다가 그 친구를 제치고 지나갔다.
작년 이 대회때 나랑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누구 하나 뒤쳐지는것 없이 발 맞춰 뛰었던 친구도 만났다. 팀원이긴 하지만 서로 잘 몰라서 작년엔 어색하게 멀찍이 떨어져 뛰었는데 이번엔 인사를 주고받았다. 내가 이렇게 페이스를 늦춰서 뛰고있는데, 어째서 또 코스에서 만난거지..? 의아함이 든다.
반대로 뒤에서 와서 나를 제치고 나간 친구들도 있었다. 심지어 무려 나보다 30분이나 늦게 출발한 출발 2조 친구였다.
스테튼 아일랜드는 코스 마지막이 정말 험하다. 호흡기 치료기를 허리춤에 매달 틈도 없이 손에 들고 뛰어 겨우겨우 피니쉬 했는데 그 친구가 앞에 있었다 (!!!)
너무 빨라서 나를 제치고 가는 뒷모습조차 못 본 것이다.
러너에게는 자기의 속도가 있다
10K 대회라면 이정도, 하프마라톤이면 이정도, 풀은 이정도.
당연히 10k를 가면 하프보다는 빠른 페이스로 뛰고, 풀은 더 느리게. 하지만 나에게는 확실하게 각인된 나의 속도가 있는 것이다.
이보다 빠르게 뛰면 골인 전에 퍼질수 있고, 이보다 느리게 뛰는것도 힘들다 하는 바로 딱 그 속도.
하지만 어디 그 속도가 일년 내내 똑같고
10년 20년 계속해서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 있고, 날씨가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져서 걷기만 해도 날아갈것같은 날이 있고, 또 나이를 먹으면서 기능의 저하도 올 것이고, 반대로 경험이 쌓이는 만큼 기록이 향상되기도 한다.
그게 바로 오늘의 속도다.
모든 러너는 자기의 속도가 있고,
오늘은 오늘의 속도가 있다.
그러니 코스에서 누군가를 제쳤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힘내!”라고 얄팍한 격려를 건네서도 안된다.
단지 그의 “오늘의 속도”가 느릴 뿐,
내일이 되면 내가 감히 뒷꽁무니를 따라가지도 못할 괴력의 러너일수도 있으니까.
인생 9번째 하프마라톤이었다.
그리고, 내가 돈을 내고 뛴 대회와 그렇지 않은 평상시의 훈련 모든것을 통틀어 21km에서 최악의 기록이었다.
우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라톤까지 3주.
그리고 하프마라톤 최악의 기록…
혹시 완주를 못하게 되는것은 아닐지… 불안하고, 우울하다.
그럴때 다시 한번 생각한다.
러너에게는 자기의 속도가 있고
오늘은 오늘의 속도가 있다.
오늘의 속도가 많이 느렸다.
단지 “오늘”일 뿐이다.
그게 “나의” 속도는 아니다.
그래서 오늘 코스에서 많이 뒤쳐진 나 스스로에게
“힘내” 라고 하지 않으련다.
내일은 다시 괴력의 러너가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