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야채절임과 함박스테이크 도시락
여름의 맛이란 정말 신선한 오이를 한입 와작 베어물을때의 맛,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반으로 가를때의 향기, 그리고 새콤달콤한 육수에 겨자가 찡하게 치고 들어오는 풍미다. 요즘은 야채나 과일에 '제철'이 의미없는 시대이기도 하다마는, 그래도 간혹 겨울에 정말 훌륭한 토마토를 만났을때, 날이 잘 선 부엌칼로 슥 잘랐을때 나도모르게 "와~ 여름같다" 소리가 나올때가 있다.
여름의 '멋'을 꼽으라면 나는 나팔꽃이라고 하겠다. 나팔꽃은 이른 아침이 지나고 나면 꽃잎이 돌돌 말려들어가며 시들어버리니 꽃집에서 팔지도 않고, 잡초처럼 아무데서나 잘 자라서 흔해빠졌으니 굳이 조화를 만들어 팔지도 않고, 희귀 제라늄이나 다육식물처럼 공들여 키우는 사람도 아마 잘 없을것이다. 그래서 더 여름철에 길가에서만 볼 수 있는 계절의 느낌이 나는 것이다.
작은 외부공간이 딸린 옥탑에 살게되면서 나는 나팔꽃을 해마다 심었다. 첫 두어해정도는 온갖 정성을 다해 넝쿨도 감아주고, 가을이 되면 씨앗을 수확해 종이봉투에 고이 담아 보관했다가 이듬해 봄이 되면 모종판에 싹을 틔워 애지중지 키워 날이 따뜻해진 다음에 내다 심기도 했다. 물론 서너해부터는 배짱도 생기고, 무엇보다 굳이 그렇게 안해도 작년에 떨어진 씨앗에서 엄청나게 싹이 나온다는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씨앗 수확도 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나팔꽃은 잡초처럼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꽃이기 때문에 올해도 변함없이 꽃을 피웠다. 가스렌지에 불을 붙이면 습관처럼 창문을 연다. 나팔꽃이 몇개 피었고, 매미가 아침부터 시원하게 울어제낀다.
여름이다.
가스렌지에 불을 켜서 솥밥을 짓고, 미리 빚어 냉동해둔 함박스테이크를 에어프라이어에 돌리고, 오늘은 크게 손갈것이 없어 계란도 삶은계란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계란말이를 해보았다. 도시락통을 꺼내 밥, 고기, 야채순서로 착착 담으면 완성. 오이와 양배추를 듬성듬성 썰어 식초 3스푼 쯔유 2스푼 설탕 1스푼을 넣고 휘휘 버무려 하룻밤을 재우면 완성되는 새콤달콤한 야채절임에 겨자를 조금 같이 넣어보았더니 반찬통을 열자마자 여름의 풍미가 훅 올라온다. 아침부터 여름 분위기에 과하게 취한다. 그렇다면 이 기분을 그대로 살려서 꽃도 장식해보자며, 내용은 우아한데 복장은 전혀 그렇지 못한 반 잠옷 상태로 나가 나팔꽃을 한가지 툭 뜯어온다.
들어오려다 보니 바닥에 웬 주황색 공같은것이 있다. 우리집엔 저런게 없는데 뭐지? 하고 자세히 보니 토마토다. 올해 봄에 사다 심은 토마토 모종에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렸다. 열리는건 금방 열리는데 빨갛게 익는데는 은근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모양이라 벌써 몇주째 새파랗기만 하던 토마토가 드디어 조금 주황색이 되었다고 했더니 그걸 낼름 따버린것이다. 범인은? 자주 오시는 그분임에 틀림없다. 바로 너구리.
이제는 놀랍지도 않지만 가끔씩 당황스러울때는 있다. 뉴욕에는 너구리와 청설모가 정말정말 많다. 브루클린은 거기에 더해 새도 정말 많다. 봄에 모종을 사다 심으면 여린 새싹만 먹는 새들이 와서 죄 뜯어놓는다. 그리고 여름이 되어 열매가 익기 시작하면 너구리가 나타나 이지경을 해놓는다. 물론 가을이 깊어지면 먹이를 땅에 숨기고싶은 청설모가 몰려와 여기저기 흙에 구멍을 파놓는다..... 세계의 수도 뉴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참 얄밉게도 아예 안 익은 새파란 토마토는 건드리지도 않고 익기 시작한것을 골라서 똑 따놓은것이다. 땄으면 다 먹어서 없애기라도 하지 반쯤 먹다가 뭐가 성에 안찼는지 내동댕이를 쳐놓고 옆에 있던 멀쩡한 화분도 막 쓰러트려놓고 가버렸다. 설익은 토마토가 맛이 없어서 분했다는 뜻인가?
며칠을 연일 30도를 넘기며 푹푹 찌더니 어제부터 조금 서늘하다. 갑자기 서늘해지니 기분이 가을같다. 그렇다고 조금해할것 없다. 아직 8월은 시작도 안했고, 토마토는 이제부터 익을것이고, 신선한 오이와 잘 익은 토마토의 향기는 아직 한달은 넉넉히 맛볼 수 있을테니... 그리고 "겨우 좀 빨갛게 익었나 했더니 그걸 가져갔네! 가져갔어!!" 하며 분개하는 아침 풍경도 앞으로 한달은 계속될 것이다.
7월 29일
미니 함박 스테이크
적양배추 라페
계란말이
오이와 양배추 쯔유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