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담 May 07. 2021

문짝 하나 사이에 두고 애끓는 모정

열쇠 이야기 - 2

이런 말을 꺼내면 요즘말로 "라떼"가 되어버리는줄을 알면서도, 내 추억 속의 물건들이 이제는 현실세계에서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는 '유물'이 되어있는 경우가 있어 헛웃음이 나곤 한다. 예컨대 채널을 바꿀때 손잡이를 잡고 돌려야했던 텔레비전이라던가, 번호 버튼이 실제로 존재했던 휴대폰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중 하나로 열쇠가 있겠는데, 의외로 이것은 뉴욕에서는 아직도 현역으로 사용중인 물건이기에 지금도 나는 현재 진행형으로 열쇠에 대한 추억을 쌓아나가고 있다. 열쇠 에피소드 1편, 문짝만 호텔같았던 나의 뉴욕 첫 집에서의 추억에 이어 오늘은 두번째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열쇠로 잠그지 않아도 닫기만 하면 잠기는 그 문짝은 내가 뉴욕에 와서 살았던 첫번째 집 뿐만이 아니라 그 후로 이사를 다닌 어떤집이든 다 그랬다. 그리고 잠금장치 옆 스위치를 눌러놓으면 자동으로 잠기지 않는다는것도 모든 집이 다 그랬다. 그 후로 아기도 태어났고 해서, 혹시라도 아기를 집안에 두고 내가 밖에서 문을 닫아 잠기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늘 자동 잠금은 해제해둔 상태로 살았다. 여전히 문을 잠그지 않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사건은 종종 발생했지만 그래도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 신경을 잘 썼다고 생각하고 살던 어느날...



두돌즈음 되어 이제 말을 드문드문 시작하는 아기와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던 어느 저녁시간, 우리집 초인종이 울렸다. 우리집은 초인종만 있고 인터폰은 없는 옛날집이라서 초인종이 울리면 1층까지 내려가서 직접 확인을 해야하는 번거로운 구조인데, 이미 꽤 익숙해진 상태라 재빨리 슬리퍼를 신고 내려가보니 잘못 누른것 같았다. 에이 귀찮게 계단으로 뛰어내려왔는데 이게 뭐야 하며 올라가 집에 들어가려고 보니, 아뿔사.




잠겼다



자동 잠금장치는 분명 해제해놓은 상태인데 왜 문이 잠겼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문 안에는 두살배기 아이가 혼자 있다. 열쇠도 핸드폰도 집 안에 있고, 문은 안에서 열어야만 열린다. 말을 하는것도 알아듣는것도 미숙한 아기는 "문을 열어!" "손잡이를 돌려!" 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그 작은 손과 악력으론 현관문 손잡이를 돌릴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것처럼 불안감은 엄습해오고, 아이는 울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아이를 안심시켜야하는데, 그 전에 내가 진정이 안되고, 문은 열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았던 모든 건물은 관리인이 같은 건물에 상주하는 큰 건물들이었는데 하필이면 이번에 처음으로 3층짜리 작은 건물에 살게된 것이다. 브루클린에 흔한 이 3층짜리 타운하우스들은 관리회사가 여러개의 건물 관리를 위탁받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리인 전화번호는 알지만 그건 스마트폰이 알고있는거고 내 머릿속에 있을리 없다. 문짝을 사이에 두고 울기 시작한 두살배기와 건너편에서 식은땀만 흘리고 있어봐야 시간만 지체될 뿐...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되느냐고 누구에게든 묻고싶은데, 동네에 아는 사람들은 몇 있었지만 문이 잠긴 집에 두살배기만 두고 다른사람 집까지 다녀올수도 없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우리집 1층에 이발소가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오며 가며 얼굴은 아는 사이기에 당장 뛰어내려가 상황을 이야기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이발소 주인은 침착하게 관리인에게 연락을 했고, 근무시간이라고 하기엔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리인은 싫은 내색도 없이 바로 마스터키를 가지고 와주기로 했다.



다행중 불행이었던것은 관리인이 꽤 먼곳에 살고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우리집 관리인은 우리 동네 어딘가에 살고있는줄 알았지 차로 40분이나 걸리는 다른 지역에 살고있는줄은 생각도 못했다.



관리인은 오고있고, 두살배기는 울다 그치다 하고, 나는 문앞에 매달려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있었는데, 침착한 이발소 주인이 와서는 남편한테는 연락을 안해도 되느냐고 한다. 그순간 정말 현대문명에 환멸을 느꼈다. 내가 남편 전화번호를 모르는 것이다. 손바닥만한 휴대폰 하나 곁에 없다고, 사람이 이렇게나 무력해진다니 새삼 허탈했다. 현대문명은 나를 남편 전화번호도 모르는 무력한 여자로 만들었지만, 바로 그 현대문명 덕에 나는 이발소 주인의 스마트폰으로 남편 회사를 검색해 대표번호로 전화를 건 다음 내선으로 연결받는 문명의 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전화를 제대로 끊지도 않고 내던지듯 두고 남편도 집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40년같은 40분이 지나 열쇠뭉치 찰랑이는 소리와 함께 관리인이 뛰어올라왔고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상황이 종료되었다. 조난을 당했던 사람들은 자기를 구하러 온 구조견의 모습을 평생 잊지못한다고 하던데, 그야말로 지금도 나는 가끔 관리인이 우리집 계단을 뛰어올라오던 모습이 생각난다. 미안함과 고마움에 뭐라도 말해야한다는 생각에 우물거리는 나에게 관리인은 그냥 아무말도 하지말고 들어가보라며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나갔다. 당시엔 우리 모두 경황이 없어서 관리인을 불렀지만, 열쇠공을 수소문해 불렀어야 했던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저녁식사 시간이었을텐데, 왕복 1시간 반이나 되는 거리를 차를 끌고 질주해 와준 관리인에게, 그리고 자기 영업장은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신경을 써준 이발소 주인에게 어찌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아이는 좀 울었지만 바로 진정되었고, 남편도 바로 직후에 도착했다. 정말 다행이었던것은 가스렌지에 올려둔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였다. 가스렌지에 올려둔게 있었다면 관리인이고 열쇠공이고 기다릴 새 없이 소방서에 연락해 문을 뜯었을것이다. (이 또한 소방관이 문을 뜯어주는 상황을 직접 경험한 나의 소견이다. 대체 뉴욕에서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렇게나 다이나믹하단 말인가)



세식구가 겨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니 문이 왜 잠겼느냐가 몹시도 궁금해진다. 자동잠금 방지 스위치가 문을 열고닫는 도중에 풀렸나보다 그냥 그정도로 추측을 하고, 살다보니 별일을 다 겪네, 애 키우다보면 별일이 다 생겨 그런 말로 그날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나는 두살배기가 그 자동잠금 스위치를 딸깍거리며 노는 장면을 목격했다. 누를때마다 딸깍딸깍 소리가 나는것이 재미있기도 했겠지만, 설마 그걸 손댔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어느날 허망하게 문이 잠겨버리는 사고를 당했으니, 이제는 언제라도 또 잠길 수 있다는 생각에 주거침입의 위험이고 뭐고 우리는 현관문 열쇠를 문밖에 두고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물론 그 후로 몇번은 아주 요긴하게 써먹었다.

현관문 열쇠를 현관 밖에 둔다니 너무 위험한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당연히 나도 했지만, 그 또한 부질없었음을, 또 한번의 열쇠 사건으로 알게되었다.




이제는 유물화되어 잘 쓰지도 않는다는 열쇠 하나에 얽힌 이야기가 많기도 하다. 세번째 열쇠 사건은 그로부터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다음에는 그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작가의 이전글 문짝만 호텔같았던 뉴욕에서의 첫 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