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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Jun 03. 2021

뉴욕 시내 모든 아파트 문을 여는 카드가 있다고?

열쇠 이야기 - 3

카드키, 번호키가 일반화되어버린 서울에서 미국으로 이사를 한 나는 잠옷바람에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복도에 나갔다가 집 문이 잠겨버리는 사건으로 화려하게 뉴욕 생활을 시작했다. <열쇠 이야기 1편> 문짝만 호텔 같았던 뉴욕에서의 첫 집

그 후, 열쇠라는 새로운 문명(?)에 익숙해져 별 탈 없이 생활 하던 중, 두돌 즈음 된 딸은 집 안에 나는 문 밖에 갇혀버리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열쇠 이야기 2편> 문짝 하나 사이에 두고 애끓는 모정 편이다.

그 사건 이후로 우리는 현관문 밖에 열쇠를 두고 생활하는 위험천만한 생활을 시작했는데, 설사 도둑이 들어 집안 물건을 털린다 해도 어린 아이 혼자 집안에 두고 문이 잠기는 사태보다는 백번 천번 낫다는 판단하에, 아주 클래식하고도 뻔한 방법인 '현관 발매트 아래에 열쇠를 두는' 방식을 택했다.

요즘같은 세상에? 범죄로 이미지가 나쁜 미국에서??? 그것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브루클린은 생각보다 그렇게 치안이 나쁜곳이 아니며 (동네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을 열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열쇠가 있건 없건 문 따는건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뉴욕 시내의 웬만한 집 문은 다 열 수 있는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돈 3불이면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세번째 열쇠 사건은 두번째 사건 이후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일어났다. 두번째 사건때, 건물 관리인이 차를 몰고 질주해 와서 마스터키로 열어준 문 안에서 와앙 울며 뛰어나온 아기는 에어메리 내복 차림이었다. 세번째 사건때는 내가 반바지에 다 늘어난 반팔티셔츠 차림이었으니 그해 여름 일이다. 정확히는 더운 날씨가 갓 시작되었을 즈음이니 5월이나 6월쯤 되겠다.


왜 하필이면 "더운 날씨가 갓 시작된" 시점임을 기억하느냐 하면, 당시 우리집에 에어콘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브루클린에 흔한 타운하우스 꼭대기층에 있다. 이 타운하우스라는것이 독특한점이 있다면 앞뒤로 길다는것, 그리고 옆벽을 옆집과 공유하고 있어서 옆면에는 창문이 없다는 점이다. 대신 이 길쭉한 집의 앞면과 뒷면에는 창문이 큼직하게 잘 나 있기 때문에 온 집안 방문을 다 열어두면 집 전체를 관통하며 바람이 잘 통하는것이 타운하우스의 장점이다. 맨하탄의 집들이 환기나 채광은 어디갔든 방과 화장실만 있으면 집이라는 느낌의 열악한 환경이었다면 (물론 집 밖에 펼쳐진 맨하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어마어마하지만) 브루클린의 집들은 환기나 채광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여름철에는 앞뒤 창문을 열어놓고 방문을 다 열어두면 따로 선풍기나 에어콘 없이도 여름의 대부분의 날을 보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집은 모든 방문을 열어놓고 생활하는것에 익숙해있었는데, 그날은 두살배기가 웬일로 엄마를 찾지도 않고 방에서 혼자 꼬물꼬물 잘 노는가 싶은 흐뭇한 상황에서 사건은 벌어졌다.



애 키우는 엄마는 낮 시간동안 하는 행동이 두가지 뿐이다. 애랑 놀거나, 아니면 애 먹을것을 만들고 치우거나. 웬일로 혼자 잘 놀길래 이때다 싶어 부엌에서 후닥닥 설거지도 마치고 먹을것을 준비하고 있노라니 갑자기 방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문고리를 요란하게 덜그럭 덜그럭 거리는 소리다. 아휴 이렇게 시끄럽게 소리내면 못써요~ 하며 뒤를 돌아본 순간,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열려있어야 할 방문은 닫혀있고, 문고리는 밖에서 봐도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는데 문은 열리지 않는다.



또, 잠겼다


이번엔 방문이다. 지난번 현관문 잠김 사건으로 열쇠를 문 밖에 두는 과감한 시도까지 했건만 이번엔 방문이다. 그리고 늘 이런일이 일어날때 핸드폰은 잠긴 문 안에 있다.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놀래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것인지, 더워서 땀이 나는것인지 모를만큼 더운 날이었다. 그해 처음으로 더웠던 날이라 아직 에어콘도 설치하지 않았는데, 그 더운 방 안에 아이는 갇혀있고 핸드폰은 방 안에, 나는 밖에 있다.


이제는 너무 크게 당황하고 우왕좌왕 하는 일 없이 바로 1층 이발소로 내려갔다. 더운날 집에서 아기랑 뒹굴대던 복장이라 있는대로 늘어나다 못해 삭아빠진 반팔 티셔츠가 민망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그런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때 그 이발소 주인은 이제 내 얼굴만 보고도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다. 마침 자기네가 실내 공사를 하고있어서 건물 전체 마스터키를 잠시 빌렸다며 카운터 서랍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주었다. 하지만 그 열쇠 꾸러미에 침실 열쇠는 없었다.

지은지 100년 된 타운하우스. 언제 바꿔달았는지도 모를 낡은 방 문. 그 방문의 열쇠는 누구도 관심도 없고 필요도 없고, 그런식으로 열쇠 꾸러미에서 누락된지 수십년이 지난 어느날 한 어린이가 엉겁결에 문을 잠궜고 다시 그 문을 여는 방법은 몰라 방 안에 갇혔다.


방문 잠긴것  여는것이 뭐 그리 어렵느냐 하면, 요즘 나오는 문 손잡이는 잠근다음 안에서 손잡이를 돌려 열기만 해도 열리지만 이놈의 백년된 타운하우스의 언제 달았는지도 모를 방문은 그런 손잡이가 아니었다.




문은 가운데 있는 잠금쇠를 돌려 잠그고, 반드시 그 잠금쇠를 다시 풀어야만 열리는 구조였다. 현관문 같은 쇠문도 아니고, 고작 방문짝 하나 나무로 된 것인데 그냥 세게 밀면 부서지는거 아니야?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의외로 문이라는게 견고한것이었다. 이 문의 열쇠는 누구도 갖고있지 않으니... 여는 방법은 수리공을 부르는 방법 뿐이라는 생각으로 이발소 주인에게 열쇠수리공 연락처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세상에!




헤이, 유! 열쇠공이지?

놀랍게도 마침 바로 딱 그 순간, 이발소에서 순서를 기다리느라 앉아있던 손님중에 열쇠수리공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의 이발사는 손님들과도 친해서 무슨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고있었던 것. 그렇게 기적적으로 단 1분만에 아래층 이발소에서 열쇠공을 섭외해온 나는 한손에 드릴같은것을 들고 앞장서 올라가며 "어느문이야?" 라고 말하는 열쇠공의 박력에 반하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침실문을 가리켰다.


딱 봐도 나보다 한참은 어린것 같았던 젊은 열쇠 수리공은 피식 웃으며 드릴을 내려놓고 지갑에서 웬 카드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10초도 안 걸려 그 문을 열었다. 애는 땀으로 머리가 흠뻑 젖은 채로 울다가 웬 낯선 남자가 문앞에 서있으니 당황해 울음을 뚝 그치고, 나는 그 문을 연 상황이 당황스러워 그 "카드"를 든 손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뉴욕 시내의 웬만한 문은 다 연다는, 나도 그 전까지 말은 들어봤던 그 카드.




뉴욕 지하철 카드 [메트로카드]였다. 2020년 코로나 사태를 기점으로 전자페이가 급속도로 도입되었는데, 그 전까지 지하철과 버스를 이런 마그네틱 카드로 탔다. 그렇다. IC카드가 아닌 마그네틱 카드였다. 옛날 공중전화 카드 같은 얇고 빳빳한 그 카드 말이다.


이 카드를 문 틈으로 끼워넣고 교묘하게 탁탁 치면 어느순간 잠금장치 틈 사이로 카드가 들어가면서 문이 열린다. 이 카드로 잠긴 문을 열 수 있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들었고, 누구나 연습하면 열 수 있다는 말도 들었는데 실제로 그 기술을 눈으로 보고 나니 신기하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고 하여간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

유튜브에 찾아보면 정말로 기술을 가르쳐주는 영상도 많은데, 그날 우리집에 왔던 사람은 전문 열쇠공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카드가 전혀 손상되지도 않고 다시 지하철도 잘 타고다닐 수 있을 만큼 멀끔한 상태로 작업을 마쳤다.


하여간 이와같은 열쇠 사건으로 우리는 마스터키조차 없는 이 집의 방 문 손잡이를 다 빼고 아예 잠금장치가 없는 손잡이로 바꿔달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것은 벽장이 아닌 큰 방에 아이가 갇혔던 점이라고나 할까...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열고닫던 문인데, 손잡이를 바꿔달며 보니 우리집은 벽장 문도 안에서 잠그는 잠금쇠가 있었다. 그 비좁고 사방이 막힌 벽장에 들어가서 실수로 문을 잠궜는데 다시 열줄은 모른다...?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엄청난 사고다.


열쇠와 관련해서는 정말 조심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달 간격으로 두번이나 이런 일을 겪고 나니 한동안은 닫혀있는 문만 봐도 가슴이 철렁 철렁 내려앉았지만, 정신없이 사는 사이 아이는 자랐고 물론 우리도 그때의 충격과 패닉을 많이 잊었다. 이제는 오히려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탁 닫고는 엄마 아빠는 들어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인형놀이를 하곤 하는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내용이 다 들리는 비밀스러운 놀이라는게 함정) 어린이로 성장한 그때 그 아기도 언젠가는 우리집 문에는 왜 잠금장치가 하나도 없는지, 과거사를 털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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