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한번은 뉴욕 마라톤을 뛰자
내가 살면서 해 온 수많은 결정 중에 단연코 가장 황당한 것 1위가 아닐까 싶다. 어느날 나는 마라톤을 뛰기로 했다. 10k도 아니고 하프마라톤도 아닌, 그냥 쌩짜로 42.195km를 달리는 풀 마라톤을 말이다. 평생을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기 때문에 주변 모든 사람들이 "니가?" "마라톤을?" 이라는 반응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가장 당황스러웠다.
더욱 당황스러운것은 저 고생스러운 마라톤을 내가 자발적으로 뛰겠다는데, 게다가 꽤 비싼 참가비도 낸다는데, 그나마도 참가 자격 따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점이었다. 이게 바로 고생을 사서 한다는 그 상황인가 싶은데, 거기에 품절임박 구매경쟁까지 해야한다니. 더러워서 안하고 만다.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랬다면 D-300일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 마음이라는게 요상해서 '대체 뭐가 그렇게 특별하길래 다들 이걸 하고싶어 안달이 난건지' 나도 그게 알고싶어 안달이 나서는 1년동안 공들여 드디어 나도 참가자격을 얻었다. 1년동안 대회를 9번 뛰고 자원봉사 1번을 하고, 얼음이 꽁꽁 어는 1월에 시작해 다시 털모자를 쓰는 11월에 챌린지를 끝내면서 뉴욕시티 마라톤에서 자원봉사도 했다. 내년엔 나도 저 파란 판초를 입고 메달을 걸고 이 거리를 활보하리라. (활보... 라기 보다는 기어다닐수나 있을런지..?) 가슴이 벅차고 숨도 찬 1년을 보내고 드디어 2023년이 밝아 어느덧 D-300일을 맞이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간밤에 비가 왔는지 땅이 축축하다. 대망의 300일을 맞이해서 새 신발을 신고 불타는 각오를 다지며 동네 공원을 3바퀴정도는 뛰어야지 하고있는데 김이 팍 샌다. 그래도 날이 날이니만큼 안 뛸 수는 없고, 벌써 3년째 되어 꼬질꼬질한 우천용 러닝화를 꺼내신고 어기적거리며 나간다. 날씨가 우중충 그 자체다. 컨디션도 별로라서 한바퀴를 뛰고 공원 앞 커피숍에서 솥뚜껑만한 스콘을 사서 먹었다. D-300일이라는 특별한 날인데 완전히 잡쳤다 싶었다. 한 15km 정도 멋지게, 들숨 날숨 완전 찢었다 싶을 정도로 달려줘야 하는 날인데 말이다.
그런데 스콘을 먹고 있노라니 어머 웬일? 저쪽 테이블 신사분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는것이 아닌가!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나 싶다가, 이정도면 아직 젊어보이는건가 싶다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데... 가만보니 낯이익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저기 혹시...?" 를 시전하다보니 같은 런클럽 멤버다.
그렇다. 나는 런클럽에도 가입해 활동하는 마음만큼은 열성 러너다. 하지만 현실은 몸이 따라주지 않는 런린이 이기 때문에, 애초에 페이스 자체가 넘사벽인 앞그룹 멤버들은 얼굴도 제대로 본적이 없다. 그들은 너무 빨라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쪽 신사분과 이쪽 '갓 달리기를 마치고 게걸스럽게 솥뚜껑 스콘을 먹던' 봉두난발 여사님은 소위 스몰톡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이 사람을 거의 못 봤던 이유는 페이스가 빠른 그룹이라서가 아니라 아예 종목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자기는 50km 이상을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과 산길을 달리는 "트레일 러닝" 그룹이라고 했다.
띠용!
42km도 무모한데 울트라라니!!
평지도 힘든데 산비탈이라니!!
울트라마라톤이나 트레일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쯤이야 나도 알고있었지만 인스타그램이나 스트라바 속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당연한데도 신기했다. 그런 나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는 말했다.
울트라 마라톤은 하나도 안 어려워.
최대한 천천히 뛰고, 많이 먹으면 돼.
빨리 뛰는게 아니고, 그냥 뛰는거야.
스스로에게 넓은 마음을 가져야해.
페이스가 10초 20초 늦어지는거? 그런건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뛰는게 아니고 그냥 뛰는거야. 스스로에게 관대해져야돼. 천천히 뛰고 많이 먹는거. 그게 다야.
게걸스럽게 한참이나 먹었는데도 아직도 반이나 남은, 그리고 반을 먹고 나니 이제 좀 상식적인 스콘 사이즈가 된 솥뚜껑 스콘을 한손에 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원래 느리고, 원래 많이 먹어...
이름 스펠은 J로 시작하지만 읽기는 "요한"이라고 읽는다는 그 멤버는 나랑 스트라바 친구를 맺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럼 넌 이미 준비가 되었으니 울트라 마라톤을 하도록 해" 라는 말을 남기고.
뉴욕시티 마라톤 300일 전을 맞이해 비장한 각오로 뭔가 거창한 하루를 맞이한 나에게 깨달음을 주러 나타난 산신령인가 싶었다. 그렇지. 장거리 달리기는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 되는게 아니지. 페이스가 10초 20초 느려지는건 아무것도 아니지. 물론 요한은 풀코스 마라톤보다 훨씬 긴 거리에 도전하는 울트라 마라토너지만, 하프까지가 한계였던 나에겐 마라톤 정규 코스가 그런 것이다.
D-300일의 일기를 적고있는 오늘은 사실 D-290일이다. 300일이라는 숫자에 맞춰 그럴싸한 글을 쓰고싶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더욱 글이 써지지 않았다. 이런 날은 앞으로도 수도 없이 올 것이다. 하지만 매번 "잘" 해야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지 않으면 300일동안 달리기를 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흔히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마라톤. 그 300일의 여정을 여기에 적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잘 하려는 마음에 열흘동안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래서야 시작 할 수 없다. 스스로에게 넓은 마음을 가지고 "그냥" 해 나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내가 잘 쓴다고 용을 써봐야 하루아침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되는것도 아니니 말이다.
매번 감동의 휴먼 드라마 같은 글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비장하고 거창한 날도 있을테고, 아무것도 아닌 날도 있을테고, 힘든 날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럴때마다 '오늘은 페이스가 좀 느린 날이네' 하고 내일을 기약하면 된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나는 뉴욕시티 마라톤을 향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