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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Mar 09. 2023

중요한것은 뛰겠다는 마음

D-244

그날은 유난히도 날씨가 좋은 월요일이었다. 월요일 아침은 공원에서 달리는 사람이 가장 적은 시간이다. 출퇴근이 따로 없는 나는 월요일 아침에 달리기를 한다. 한적해서 좋기도 하고, 주말 내내 돌밥돌밥 하며 복작대던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고 나서 간단히 집 정리를 하고 로봇 청소기를 켜놓은 다음 공원을 달리는것으로 온전한 '나의 시간'을 만끽하는것이 월요일의 작은 즐거움이기도 하다. 


날씨가 좋아 달리는 기분이 한결 더 상쾌했다. 기분 좋은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침은 뭘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던 바로 그 때!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열쇠를 안 가지고 나왔음을....



그렇다. 뉴욕에서는 아직도 열쇠를 쓴다. 디지털 도어록이 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늘 짤랑거리며 열쇠꾸러미를 가지고 다녀야하는데, 아뿔싸... 일년에 한두번 일어나는 그 일이 바로 오늘 일어나버렸다. 그렇다고 크게 당황할 필요는 없다. 뉴요커에게 이런일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당황하면 찐 뉴요커가 아니다. 이런 날을 대비해 가까운곳에 사는 친구에게 열쇠를 맡기는것도 뉴요커의 풍류라고나 할까. 여유롭게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여기서부터는 당황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는 맨하탄으로 향할 순간이다. 열쇠를 가지고 맨하탄으로 출근한 남편 회사로 찾아가 열쇠를 받아오면 될 일이다. 물론 나는 운동을 다녀온 길이라 화장은 커녕 눈썹도 그리지 않은, 무릎 나온 츄리닝 차림의 후줄근한 몰골이지만, 그리고 남편의 회사는 뉴욕에서도 가장 패셔너블한 소호에 있지만, 그래도 나는 가야한다. 

그래서 잠시 고민을 한 뒤 나는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으로 소호에 가야한다면, 운동 하러 온 척을 하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바로 시티바이크(뉴욕의 따릉이)를 타고 소호를 향해 출발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여정이었다. 브루클린에서 맨하탄을 가려면 다리를 건너가야하는데 이상하리만치 가운데가 볼록한 그 다리들은 걸어서 건너기에도 가파른 경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몸, 뉴욕시티 마라톤을 위해 나름 스피닝 클래스에서 피땀눈물을 쏟아가며 혹독하게 훈련한 보람이 있어서 자전거를 타는것은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신호대기, 길 잃고 헤매기, 교통체증 사이에 끼어서 오도가도 못하기, 트럭 뒤를 따라가며 무서워서 벌벌떨기에 허비하는 바람에 소호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이나 걸렸다. (지하철로 20분)



열쇠를 받고 물도 한병 마시고 한숨 돌리고 보니, 해가 중천에 떠서 날씨가 더! 좋아졌다. 뉴욕의 올 겨울은 아주 따뜻했다. 해마다 한두번은 왔었던 폭설도 전혀 없었을뿐더러 눈 구경도 못하고 겨울이 다 지나갔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청명하게 맑은 날에 바람도 없어 포근한 날씨가 정말이지 봄 같았다. 그래서 또한번, 모든것은 "날씨가 좋아"서, 이번엔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온 그 길을 이번엔 달려서 가보자. 그런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이미 공원에서 6km를 뛰었고, 자전거로 9km를 왔는데, 그 다음 바로 이어서 9km를 다시 달려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는것 자체가 대박사건인것이다. 태어나서 평생을 몸치 운동치로 살다가 코로나때 할일이 없어서 달리기를 시작했을뿐인 내가 말이다. 브루클린에서 맨하탄을 자전거로 오기만 해도 대단한데, 이번엔 감히 뛰어서 그 길을 되돌아간다는 생각을 했다? 

날씨가 좋다는것은 이렇게나 무서운 일이다.



조금 걷다가 슬슬 달려보니 의외로 또 할만해서 또한번 놀라고, 날씨에 감탄, 풍경에 감탄(브루클린 브릿지를 뛰어서 건널때의 풍경은 말로 다 설명이 안될만큼 멋지다), 그리고 관광객이 이렇게나 많음에 또 한번 감탄!! 하며 다리를 건너니 여기부터 브루클린이라는 사인이 나왔다.



브루클린에 들어왔으니 마음은 이미 내집 안마당이라 제 아무리 멀다 해도 금방이다. 하지만 사실은 브루클린이 맨하탄보다 훨씬 커서 안마당 취급 하기에는 아직도 갈길이 멀지만 말이다. 원래 사람이 모르는 길을 가면 더 멀게 느껴지고 아는 길을 가면 실제보다 가깝게 느끼는 법이다. 


사람이 하루에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면 힘들어서 쓰러지는건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같은 사람도 이게 된다니 신기한 마음에 더 힘이 났던것 같다. 집으로 가는 버스 노선을 따라 뛰면 유혹이 생길 것 같아서 일부러 버스 노선이 아닌곳으로 뛰었다. 중간에 너무 배가 고파서 맥도날드로 뛰어들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지난 주말에 한인마트까지 가서 사온 신선한 삼겹살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 드디어 도착. 



달리기 6km, 자전거 9km, 다시 달리기 8km를 한번에 한 날. 기분은 이미 철인이다 철인. 

잊지말고 스트레칭, 폼롤러부터 해주고, 고생했으니 삼겹살을 거하게 구워 푸짐하게 먹고 누우니 웃음이 나온다. 



의외로 한 단계 올라서는 과정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계기로 달성되기도 한다. 날씨가 좋아서 라던가, 열쇠를 두고나와서. 뭐 그런 시덥잖은 이유로 말이다. 피땀눈물을 쏟아가며 갑자기 귓가에 위아더 챔피온이 BGM으로 깔리면서 슬로우 모션이 걸리는 그런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의외로.

그러고 보면 내가 처음으로 하프마라톤을 완주하던 순간에도 BGM 따윈 없었다. 눈물을 펑펑 흘릴줄 알았는데 그런것도 아니었다. "아 밀지마세요!!" 하다보니 골인지점에 들어가 있더라 하는 그런...


그래서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겁낼게 뭐 있어? 이런식으로 몇번 하다보면 20km 30km, 40km... 그렇게 쭉쭉 가는거지. 거리, 페이스, 시간... 숫자 앞에 지레 겁먹지 말고 왼발앞으로 오른발앞으로. 그것만 하다보면 언젠가 닿는다. 

중요한것은 뛰겠다는 마음. 


중뛰마. 

그렇게 오늘도 신발끈을 조여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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