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담 Mar 09. 2023

K-사우나 전파의 꿈

D-242

나는 평생 달리기는 커녕 운동 자체를 해본적이 없다가 코로나때 그야말로 너무 할일이 없고 갈데도 없어서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그런데 의외로 또 한번 시작한 후에는 재미에 푹 빠져서 일주일에 3번 이상은 반드시 달리기를 하는 생활을 3년정도 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되게 의외인것이, 나는 오늘 트레드밀을 처음으로(!!) 뛰어봤다는 것이다. 


트레드밀 일명 런닝머신은 헬스장에 가면 기본으로 "먼저 런닝부터 뛰고오세요" 라고 하는 바로 그 머신이 아닌가. 저걸 어떻게 안 뛰어봤을 수가 있나 싶지만, 헬스 자체를 별로 다녀본적이 없고 아주 간헐적으로 다녔던 시절에도 어떻게든 저 기계를 피해보고자 "런닝머신 말고 자전거 타도 되죠?"를 주로 시전하고, 때때로 트레이너 선생님이 자전거 안된다 무조건 런닝머신 해야된다 할때는 뛰는것도 걷는것도 아닌 애매한 속도로 뛰는 척을 해본게 전부인 그런 물건 되시겠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에는 늘 실외에서 뛰었다. 더우면 더운대로 전기구이 통닭같은 몰골로, 추우면 추운대로 머리카락 끝에 고드름 생성해가며 달렸다. 그게 러너의 멋이고 간zi라고 생각했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로드가 아니면 달리기를 하지 못할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왜들 말하지 않는가. 런닝머신과 실제 달리기는 다른거라고... 그러니 평생을 몸치 운동치로 살아온 나는, 신발만 바꿔도 운전을 못한다던 초보운전 시절의 우리 엄마처럼 "로드가 아니면 못뛸지도 몰라" "다른 지역에 가면 못뛸지도 몰라" "긴바지를 입으면 못뛸지도 몰라" 등등 걱정병의 연장선상에 "트레드밀이면 못뛴다"를 머릿속에 늘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모른다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확신이었다. "트레드밀이면 못 뛸지도 몰라"도 아니고 "못뛴다"였다.



게다가 미국치고는 날씨가 추운 지방이긴 해도 한국처럼 살을 바르고 뼈를 에이는 그런 추위가 아니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밖에서 그럭저럭 뛸만했고, 한여름에는 새벽에 일찍 나가 뛰면 되는 일이니 굳이 답답한 실내에서 햄스터처럼 뛸 이유가 없었다. 코로나 시국에 달리기를 시작해서 실내에서 뭘 하는것이 부자연스러웠던 이유도 한몫 했다. 



그러다 오늘 문득! 우리동네 YMCA 탈의실 속에 있는 아주 작긴 해도 건식과 습식이 갖춰진 사우나가 코시국의 일시폐쇄를 끝내고 재가동 되는걸 몇달째 지나가며 구경만 하다가, 한번 지져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뭔가 날씨도 시원찮게 추운것도 아니고 아닌것도 아닌것이... 이럴때 확 더운데서 땀 쭉 빼고 시원한거 한사발 마시면 개운할것 같은 생각이 갑자기 막 몰려오면서, 이렇게 나도 K-아줌마 체질이 되는건가 하면서도 어느새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넣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럼 간김에 사우나만 하지 말고 그 전에 트레드밀을 좀 뛰어보면 되겠네. 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오늘 또 한번 내 안의 작은 계단을 한단계 올라설 생각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일단 과장 조금 보태서 우리집 텔레비전만한 화면이 달려있는 시점에서 한번 놀라고, 달리는 속도에 맞춰 풍경도 움직이는 인터랙티브 런닝인지 뭔지에 또 한번 놀라고, 일단 이 기계를 어떻게 시작을 시켜야 하는것인가 부터 난감했지만 디지털 우등생인 한국인의 본능이 깨어나면서 해결되었다. 그리고 놀랍지도 않게, 어쩌면 당연히, 나는 트레드밀에서도 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트레드밀에서 뛰는것은 도로에서 뛰는것보다 쉬웠다. 경사도를 제법 올려도 다리가 전혀 피로하지 않아서 이대로라면 한시간 두시간도 뛰겠다 싶었다. 하지만 숨이 차는 정도는 도로에서 뛰는것과 거의 같아서 복잡미묘한 느낌. 보통 도로에서 뛸때는 숨이찬것보다 다리가 아파서 달리기를 끝내는데, 트레드밀은 반대로 다리는 계속 뛰겠다는데 숨이 차서 쉬고싶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높았던 장벽은 지루함이었다. 앞에 달린 대형 모니터로 북이탈리아의 끝내주는 풍경이 펼쳐지며 산골 비탈길을 달려 베네치아의 운하 옆을 물에 닿을듯 달리는 장면을 계속 보고 있어도 지루한건 마찬가지였다. 매일 같은 공원을 달려도 풍경은 매일 다르고 지루할 틈이 없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고 다녔는데, 트레드밀은 30분 뛰는것도 지루했다. 게다가 실감나는 북이탈리아의 풍경은 나에게 가벼운 멀미까지 선사했고 말이다.



모니터에 나오는 시간표시를 초 단위로 염불 외듯이 따라 읽으며 30분 달리기를 끝낸 다음, 그래도 지루하긴 해도 아주 추운날이나 비 오는 날은 가끔 뛰어야겠다 생각하며 두근두근 드디어 사우나 타임이 왔다. 사우나 룸은 진짜 작아서 꽉 차게 끼어 앉아도 대여섯명이 한계일것 같았다. 들어가니 백인 할머니가 길게 누워있다가 나에게 시간을 묻는다. 그리고 사우나에서 말이 터지는거는 전세계 공통인지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땀을 쭉 뺐다. 잠시 나가서 열을 식히고 물도 마시고 이번에는 습식 사우나에 도전했다. 방금전에 들어갔던 건식 사우나와 똑같은 사이즈의 방인데 여기는 수증기가 꽉 차 있어서 한치앞이 안 보인다. 손으로 눈앞의 증기를 헤쳐가며 앉을곳을 찾다가 증기 사이로 갑자기 나타난 사람에 화들짝 놀라고 그 사람도 놀라고 그리곤 까르르 웃고, 내가 널 칠뻔했네? 내가 따귀를 맞을뻔했네 등등 낄낄거리며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여전히 한치앞지 안 보이고 기묘한 기분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출구가 어느쪽인지 잊어버려서 못 나갈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있는데 갑자기 쿠왕~~~ 하는 굉음이 울리며 증기가 한층 더 짙어지는것이 아닌가. 정말 순간적으로 무서워서 따귀 칠 뻔 했던 그 사람과 둘이 수건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밖으로 뛰쳐나와 또 깔깔거리고 한참을 웃었다. 



피곤해서 사우나는 이정도로 하기로 하고 목욕 하고 나오려는데 얼음동동 수정과 생각이 간절하다. 다음엔 싸갖고 와서 마실까? 그거 뭐 마시는거니? 하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되지 수정과... 시나몬 진저 티? 인스타 갬성 카페 메뉴명같은 단어를 생각해내곤 웃겨서 또 혼자 웃는다. 간만에 찜방에서 몸을 지졌더니 얼굴 모공이 확 늘어났다. 이럴땐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마스크팩 하나 붙이고 맥반석 계란을 까야되는건데 생각하며.... 언젠가 내가 이 YMCA 사우나 룸에 K-사우나 문화를 전파하면 얼마나 웃길까 생각해본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이, 다양한 문화배경의 여자들이 손바닥만한 사우나에서 양머리를 하고 앉아 영어 반말로 근황을 주고받는 상상. 아줌마는 3대 몇 쳐요? 아뇨 저는 쇠질은 안하고요 유산소만 해요. 아이구 마라톤 하시는구나 티셔츠 입으셨네...



꼭 그렇게 만들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