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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Mar 21. 2023

다섯개의 메달과 초능력 - NYC하프

D-231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5시. 브루클린 뮤지엄 앞에 자원봉사자들이 속속 집합한다. 노련한 직원들이 대형 트럭에서 장비를 내리고 착착 설치가 진행되고 나면 겹겹이 옷을 껴입은 러너들도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한다. 서머타임으로 1시간이 당겨진지 일주일째. 아직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7시에 뿔피리 소리가 울리고, 첫 그룹이 맨하탄을 향해 출발한다. NYC하프의 시작이다.


어제 3월 19일 일요일은 뉴욕마라톤을 주관하는 NYRR이 진행하는 5보로 시리즈 중 하나인 NYC하프가 열렸다. 뉴욕시티를 구성하는 5개의 구를 돌아가며 일년에 걸쳐 열리는 5보로 시리즈는 뉴욕을 사랑하는 러너들에겐 각별한 경기들이다. 3번의 하프마라톤(NYC, 브루클린, 스테튼 아일랜드), 1번의 10k(퀸즈), 그리고 1번의 10마일(브롱스) 대회를 마치고 나면 대망의 뉴욕시티 마라톤(풀코스)가 열리는 일정으로 NYRR의 일년이 지나간다.



작년에 무려 5보로 + 뉴욕시티 마라톤을 달성한 내 친구의 초능력 인증샷

5보로 시리즈는 의미가 특별한만큼 모든 대회에서 메달이 나온다. 보통은 하프마라톤 이상만 메달이 나오는데, 10k인 퀸즈도 10마일은 브롱스도 메달이 나온다.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디자인은 통일되어 있고 색깔이 다른 메달이 나와서 다섯개를 다 모으면 초능력이 생기는 기분이다. 거기에 황금빛 뉴욕시티 마라톤 메달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5보로 시리즈 중 가장 먼저 열리는 NYC하프는 브루클린에서 출발해 다리를 건넌 다음 맨하탄의 42스트릿, 브로드웨이 등 주요도로를 통과해 센트럴파크로 들어간다. 뉴욕시티 마라톤 피니쉬 지점이라는 머릿돌까지 박혀있는 72번가에서 끝나는것 또한 의미깊은 포인트. 올해는 눈도 거의 내리지 않고 포근했지만,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리는 뉴욕에 드디어 봄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3월 중순에 이 하프마라톤을 뛰면서 러너들은 이번 가을에 열릴 뉴욕 마라톤을 꿈꾼다. 가히 뉴욕마라톤의 씨앗을 심는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하필이면 올해, 날씨가 갑자기 굉장히 추워졌다. 대회를 하루 앞두고 한파 주의보가 나오면서 긴급 메일이 왔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어느정도 웜업이 되어서 괜찮지만, 참가자가 2만 5천명이나 되는 큰 대회인만큼 대기시간도 길어서 보온에 신경쓰라는 당부가 있었다. 확실히 작년까지만 해도 NYC하프는 반바지에 반팔티를 입었는데, 반바지는 커녕 응원단은 롱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어디 마라톤 덕후들이 날씨에 굴하는 사람이던가. 털모자에 장갑까지 끼고 1그룹부터 5그룹까지 출발하는데만 2시간이나 걸리는 뉴욕의 대 축제가 시작되었고 뛰는 사람 보는사람 할것없이 열광의 도가니였다.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뉴요커들은 달리기를 자기네 민족체육이라고 생각하는것 같다. 우리나라의 태권도처럼 말이다. 그래서 너나 할것없이 누가 달리고 있으면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시내 곳곳에서 카우벨소리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큰 대회인만큼 성대하게 열린 EXPO

그럼 이 신나는 잔칫날에, 무려 올해의 뉴욕시티 마라톤 참가 예정자인 나는, 무엇을 했는가. 당연히 11월에 뉴욕마라톤 메달을 수확하려면 3월에 NYC하프의 씨앗을 뿌려야하는게 아닌가 싶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 대회를 뛰지 못했다. 참가 추첨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속에서는 내심 올해에 5보로 시리즈를 다 뛰고싶은 야망이 있었다. 그렇다. 바로 그 황금빛 뉴욕시티 마라톤 메달을 5보로 메달로 감싸서 찍는 레전드샷을 찍어보고싶었다. 나는 평생 운동을 안해본 운동치 몸치 아줌마지만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황금메달에 오색메달이다. 그것도 NYRR이다. 이정도면 나를 런린이라고는 못 부를걸? (런린이 맞지만)


그래서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기부금 참가를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조금 있었다. 기부금 참가는 NYRR의 협약단체에 배당된 티켓을 받는것으로, 그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게 조건이다. 대표적으로는 어린이 난치병 병원인 세인트 주드 병원. 풀코스인 뉴욕시티 마라톤은 2천달러정도, 하프인 NYC하프는 천달러 정도다. 내가 그 기부금을 일시불로 긁어도 되지만, 대부분은 자기 이름으로 된 후원계좌를 열고 '내가 이 마라톤을 위해 이러이러한 단체에 이만큼을 기부하려고 한다. 내가 정말 열심히 뛸테니 기부를 부탁한다'는 취지로 지인들이나 SNS에 홍보를 한다. 실제로 내 주위에 이런 방식으로 뉴욕시티마라톤이나 보스턴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을 많이 봤고 나도 기부를 해준적도 있다. 남편이랑 단둘이 뉴욕에 건너와 지연이니 혈연이니 1도 없었던 나지만 이제는 친구도 제법 생기고 2천불은 조금 부담스럽지만 천불 정도면 모금 할 수 있을것 같기도 했다. 5보로 시리즈를 뛴다면 이왕이면 올해에. 쉽게 얻어지는게 아닌 뉴욕시티 마라톤 참가권을 갖고있는 올해에 풀세트로 한번 해보고싶은 마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5보로 시리즈 중 참가권 얻기가 힘든 대회가 2개인데 (NYC하프, 브루클린 하프) 내가 브루클린 하프의 참가 보장권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 스케줄인가. 5보로 시리즈 + 뉴욕시티 마라톤을 완성하는데 참가권이 귀한 3개의 대회 중 2개를 이미 갖고있으니 나머지 한개에 욕심이 안 나면 이상한거 아닌가..?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이 대회를 뛰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부금 참가를 너무 자주 하게 되면 지인들도 질리기 마련이다. 나에게 꼭 필요한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되도록이면 남발하지 말아야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이 대회를 포기한 이유는 올해에 5보로 시리즈를 완주하고 뉴욕시티 마라톤까지 완주해버리게 되면 내가 다시는 달리기를 하지 않게 될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물론 세상에 마라톤은 많다. 심지어 마라토너들의 영원한 꿈인 6대마라톤 완주도 있잖은가. 나는 그 중에 이제 겨우 하나, 뉴욕시티 마라톤에 도전하는 중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가본적도 없는 시카고라던가, 엄청나게 잘 뛰어야만 갈 수 있는 보스턴이라던가, 말도 못 알아듣는 베를린이라던가, 시차가 14시간인 도쿄... 그런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아스라히 먼 월드 메이저보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뉴욕시티 마라톤, 그리고 그 동생들격인 5보로 시리즈를 끝내버리고 나면 더이상 어느 골인지점을 바라보고 달려야한단 말인가.


누군가에겐 연습 없이도 뛸 수 있는것이 하프마라톤이고, 한두달만 준비해도 풀코스를 완주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인생에서 한번은 뛰어보자는 각오로 출발한 길이다. 그 길이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게 아름답다면 그 또한 좋겠지만, 너무나도 완벽한 길을 달려갈 때 나의 이 한걸음이 그 완벽함을 깨는 흠집이 될까 한걸음 한걸음을 노심초사하며 뛰고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올해의 5보로 시리즈를 포기했다. 그렇다고 나머지 4대회를 다 포기하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나머지 4대회를 악착같이 뛰어 내년 NYC하프의 게런티드 엔트리를 받는게 목표다. (5보로 시리즈 중 4개를 뛰면 이듬해 NYC하프 참가권이 보장된다)

내년에는 아마도 뉴욕시티 마라톤은 뛰지 않을 것이다. 내년에도 5보로 시리즈를 완성하진 못할수도 있다. 나의 "황금빛 뉴욕시티 마라톤 메달을 감싸는 오색 5보로 시리즈 메달"샷은 앞으로 몇년이 걸릴지 모른다. 어쩌면 먼 훗날에, 그것에 가장 근접했었던 2023년에 이 기회를 차버린 나 자신에게 분노할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때까지, 시간은 얼마든지 걸려도 좋다. 우리의 삶은 도착지점에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그것을 향해 가는 여정에 의미가 있는게 아니었던가. 완벽한 성공을 단 한번의 시도로 이루어내기 위해 너무 아둥바둥하며 살지 않아도 괜찮다.

시간은 얼마든지 걸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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