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30
어느날 YMCA에서 스피닝 클래스를 듣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라커룸에 들어가니 새 체중계가 있다. 지금까지 YMCA에 있던 체중계는 충격적이게도 추저울이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건 뉴욕에선 그게 평범하게 병원에 가도 있고 어딜가나 있다는거.. 병원에 가면 항상 키와 몸무게를 재고 시작하는데 간호사가 와서 추를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여 눈금이 평행이 될때까지 맞춘다. 첨단 과학의 집합체인 의료계에서 쓰는 저울이 쌍팔년대 쌀집 저울이라는데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면 건전지도 안 들어가고 잔고장도 없으니 흔하게 쓰는것 같다.
추저울은 귀찮은게 추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만져야되는것도 성가시지만 숨이라도 한번 크게 쉬면 평행이 흔들려서 내 몸무게를 제대로 알기도 어렵다. 게다가 여기는 미국, 무게단위도 파운드라 더 안 와닿는다.
물론 우리 집에는 kg으로 셋팅된, 블루투스로 스마트폰에 기록까지 해주는 디지털 저울이 있지만 방전된 배터리를 2년째 방치하고 있다. 달리기를 꾸준히 하고 있으니 살은 조금씩 빠지고있겠지, 게다가 달리기 할 때 입는 상하의 쫄쫄이를 입고 거울 앞에 서면 은근히 또 날씬해보이기까지 하니까 체중계보다 정확하다는 눈바디를 믿어야지. 그렇게 평화롭던 어느날....!
간만에 21세기에 걸맞는 저울이 새로 왔으니 몸무게나 한번 재볼까 하고, 기분은 새털같이 가볍게 저울에 올라갔는데....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터진다는게 이런건가 싶을정도로 "헉"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운동을 꾸준히 했는데 10파운드나 더 쪘다고???!!!
달리기 시작하고 살이 10kg 빠졌어요!
자신감은 13kg 붙었어요!!
그정도는 지방이 근육으로 바뀐거야~라고 덮어주지도 못하겠다. 130파운드는 그래도 50키로대지만 140파운드는 빼박 60키로대야!!!
이제는 말해봐야 아무도 안 믿겠지만 나는 임신 전에 110파운드였다. 출산을 하고 모유수유도 하고 온몸이 부서지게 육아를 해서 지금 그 애가 8살인데 아직도 20파운드가 안 빠진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세상에나! 심지어 거기서 10파운드가 더 붙었다니.
달리기를 일주일에 3번 이상씩, 한달에 100km씩 했으니 따로 아무것도 안해도 살이 빠질거라는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실제로 달리기를 시작하고 한순간에 살이 쪽 빠지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일단 어지간히 많이 달린다. 나보다 2배 이상은 달리는것 같다. 거기다가 서양식 식단이 기름져서 살이 많이 찔것같지만 의외로 탄수화물 줄이기가 쉬워서 달리기를 병행하면 살이 쉽게 빠진다. 달리기는 탄수화물만을 에너지원으로 쓰는 운동이라서 평상시 밥을 먹지 않는 서양인들도 큰 대회날에는 쌀밥을 먹는게 꿀팁으로 전해질 정도다.
하지만 나는 삼시 세끼 쌀밥을 먹는 한국여자. 아줌마 발목나간다 무릎나간다 핑계로 몸을 사려 달리기는 깔짝거리기만 하고, 달리기로 글리코겐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쌀밥으로 채우고, 심지어 달리기 했으니 살 안찐다며 고봉밥을 그득그득 먹고 과일까지 먹었으니... 본의아니게 착실하게 벌크업을 해버렸다.
살과 헤어질 결심
덴마크 다이어트다 키토 다이어트다, 간헐적 단식이다... 갖가지 다이어트를 하며 고통받는 친구들에게 "그냥 운동을 해~ 난 그냥 운동 하고 배불리 먹을래~" 했던 나는
그냥 운동하고 배불리 먹고 살찐 사람이 되었다 ㅠㅠ
"다이어트는 운동이 아니라 식이"라고 늘상 주장하던 친구의 말을 이제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채썬 양배추 8할에 쌀밥을 개미 눈꼽만큼 섞어 먹으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140파운드라는 숫자도 놀라웠지만 11월에 42.195 풀코스를 뛰는데 10kg짜리 등짐을 지고 뛰는거나 마찬가라는데 생각이 미치니 아무리 평화롭게 사는걸 좋아하는 나라도 이거는 살과의 전쟁을 시작할 때다.
어느날은 친구 집에 잠시 들렀는데 친구가 그 귀한 한국배를 깎아줘서 잠시 의지가 무너질뻔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해야할때라며, 전투적으로 프로틴 쉐이크를 섞으며 내가 다이어트중이라고 하니 친구가 의아해한다. 몸무게가 몇인데 다이어트를 하냐고 깜빡이도 안켜고 질문이 훅 들어온다. (친구는 중국인)
그래서 내가 140파운드라고 하니 친구가 깜짝 놀라며 절대 아니라고 한다. 아니 그러게 내가 봐도 140파운드까지는 아닌거 같다니까ㅠㅠ 그런데 YMCA에서 새 저울로 쟀는데 140파운드라고 나왔다니까ㅜㅜ
YMCA 라커룸이 지하라서 그래! 우리집 여기 지금 5층이니까 내 저울로 다시 재봐!
오 그거 그럴듯한데?
미국에서는 동양인이 수학을 잘 하고 이과적 재능이 있다는 '이미지'가 있다. 암산같은것은 대충 아무숫자나 막 던져도 동양인이 그렇다고 하면 일단 수긍할 정도다. 나와 내 친구는 둘다 동양인이지만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그 이미지에 서로 속는다 ㅎㅎ
아니 내가 지금 당분이 부족해서 두뇌 회전이 안돼...
나 지금 여기서 재서 130파운드 나오면 당장 다이어트 접는다! 지난 며칠동안 당분이 부족한 몸으로 달리느라 피폐해진 몸에 한줄기 희망이 백만볼트 전기처럼 짜릿하게 통과한다. 야 그거 신고배 손대지말고 있어봐 내가 몸무게 재고 130 나오면 그거 내가 다 먹을거니까!!
신나게 친구 저울 위에 올라가봤지만 뭐 어쩌면 당연히..? 138파운드가 나왔다.
그럼 나 2파운드 빠진거야? 아니면 중력차이야? 말을 해봐!!!
애먼 친구에게 오열하며 신고배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프로틴 쉐이크를 한층 더 전투적으로 섞는다. 나는 이제 빼박 140파운드다. 살을 빼야한다. 인생에서 한번은 뛰어보자고 출발한 뉴욕마라톤이니, 다이어트도 인생 다이어트 수준으로 간다!
+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내 옆에서
20파운드 지금 빼는게 쉬운지, 20파운드 매단채로 42.195km 뛰는게 쉬운지 그런거 일일히 종이에 써가며 계산 하지 말아줄래 친구야....... 나 허기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