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27
이번 생에 운동은 안 하고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달리기를 시작했다. 약 40년 가까이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는 심장을 강제노동 시키고, 팔다리 머리어깨 발 무릎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달리는 재미를 깨닫게 된 건 쉬지 않고 30분을 달릴 수 있게 된 시점이었다.
그랬더니 이제 슬슬 나도 "러너"를 자처해도 되는 거 아닌가 싶으면서, 주변에서 뛰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는데... 당시 핸드폰을 손에 들고뛰던 나와 다르게 다들 손목에 찬 시계를 멋지게 조작하며 삑 삑 다소 레트로한 소리까지 난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을 손에 들고뛰면 좌우 밸런스가 안 맞고 팔치기도 맘껏 안되는 것 같고 그러네...?
그럼 나도 시계를 사야겠다.
이왕 시계를 사는 거면 애플워치를 사야 된다, 아니다 러너라면 무조건 가민이다, 요즘은 코로스가 뜬다 등등...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지만 러너라면 가민이라길래 그럼 가민. 대신 좀 부담스러우니 가장 저렴한 엔트리급 모델인 포러너 45s로 정했다. 어차피 나는 한 번에 30분 정도밖에 못 뛰고, 거리로 따지면 5km 정도인데 무슨 자그마한 내비게이션처럼 지도까지 나오는 그런 고급 시계는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몇백 달러나 하는 시계(비싼데 비해 못생겨서 남편이 군대시계라고 부르는;;;)를 사놓고 과연 얼마나 달리기를 할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한 1년 정도 뛰다가 안 뛰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역시 일상생활에서도 활용도가 높은 애플워치를 사는 게 맞는 건가... 무한 도돌이를 돌다가 에라 하고 구입한 나의 첫 GPS 시계.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그 시계를 차고 2년 8개월, 거리로는 약 2,000km를 꾸준히 달렸고, 그 사이 하프마라톤을 두 번 완주하고 NYRR의 대회를 9번 뛰어 뉴욕시티 마라톤(풀코스)의 참가권을 따냈다.
나의 오랜 달리기 친구와도 같은 시계가 한 1년 전부터 골골 앓기 시작했다. 갑자기 꺼지질 않나, 다운되어서 먹통이 되질 않나, 저절로 초기화가 되질 않나... 좀 성가시긴 해도 어르고 달래 쓰고 있었는데 이제는 배터리 용량이 너무 줄어서 하프마라톤을 완주하기 전에 꺼질정도가 되었으니, 어지간히 하고 새로 장만해야 할 타이밍이다. 게다가 풀코스를 준비하기엔 아쉬움이 많은 모델이기도 했다.
달리면서 물건을 하나씩 버린다면
마지막에 뭐가 남을까?
흔히 달리기는 아무 장비도 필요 없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의 장점으로 꼽는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필요가 없느냐 하면, 꽤 필요하다.
땀에 젖으면 무거워지는 면 소재 의류보다는 드라이핏 재질이 좋을 것이고, 야외운동인만큼 햇빛을 가려줄 모자도 필요하다. 때로는 해가 비치는 방향을 향해 장시간 달려야 하는 경우가 있으니 눈을 보호할 선글라스도 필요하고, 장거리주 때는 물통도 들고뛰어야 한다. 아무래도 손에 뭘 드는 것은 거추장스러우니 몸에 딱 맞고 가벼운 가방이 필요 해질 것이다. 신발은 당연히 러닝슈즈여야 하고, 각자의 습관이나 취향에 따라 양말도 특수한 양말이 필요해진다.
그럼 그중에 가장 중요한 장비는 뭘까?
달리다가 오지에서 길을 잃었다. 최대한 에너지를 절약하면서 달려야 하니 물건을 하나씩 버리면서 뛰기로 했다. 무엇부터 버릴까?
나라면 아마도 제일 먼저 모자를 버릴 것이다. 피부는 이미 버린 것, 조금 덜 덥거나 덜 춥기 위해 쓰는 것이 모자이기 때문에 비상상태라면 없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다음은 아마도 물통이나 가방을 버릴 것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만큼 버렸을 때 에너지 절약 효과가 클 것이다. 수분공급은 중요하지만 어차피 물통에 물이 수십 리터씩 들어있는 것은 아니니까. 몸을 가볍게 해서 더 빨리 오지에서 탈출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물건을 하나씩 버리다 보면, 아마도 대부분의 러너들이 마지막에는 신발과 시계가 남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두 가지가 러너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비싼 물건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니 두배로 중요하다.
그리고 정말 최후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나는 신발을 버리고 시계를 선택할 것이다.
맨발로도 달릴 수는 있다. 하지만 시계가 없이 오지에서 혼자 달릴 수는 없다. GPS기능으로 지도를 써서 오지를 탈출한다는 선택항이 없다는 전제 하에도 그렇다. 시계 없이 달릴 수 없는 이유는, 특히 오지에서 혼자서 달릴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얼마큼의 거리를 얼마큼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를 모르는 상태로 달리는 것의 공포 때문이다.
한발 한발
앞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
깜깜한 밤에 가로등도 별로 없는 어두운 길을 달리면 느려진다. 내가 얼마큼의 속도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잘 느껴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처음 가는 길을 달릴 때나, 처음 뛰어보는 코스의 대회를 뛸 때. 거리가 길면 길수록, 뛰면 뛸수록 불안감이 커진다. 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고, 이대로 남들을 따라서 뛰면 골인지점까지는 가겠지만, 지금 나는 어디 있는 걸까...?
그럴 때 나는 시계에 찍히는 거리표시를 보며 큰 위안을 받는다. 하프마라톤의 18km를 통과하는 지점. 무릎도 아프고 발목도 아프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고, 속도가 느려지는 게 스스로 느껴진다. 주위 풍경도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럴 때, 왼손을 들어 익숙한 내 시계를 본다. 내가 한발 두발 뛰면 뛴 만큼 숫자가 올라간다. 골인지점에 다가가고 있다는 확신. 내가 앞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
아 더럽게 안 올라가네!!! 한참 뛰었는데 아직도 1km도 못 갔어!!!라고 소리 칠 기운이 있다면 아직 한참은 더 뛰어도 괜찮다.
그 아무것도 아닌 작은 손목시계에 나오는 숫자 몇 개. 그것이 나의 나약함을 채워주는 원동력임을 알기에, 나는 마지막까지 시계를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
내 데이터 저장해.....
그리고 물론!
말도 안 되는 오지에서 혼자 달린다는 듣도 보도 못한 찬스가 생겼다면, 무조건 GPS 데이터는 저장해야 된다. 구조된 다음에 제일 먼저 strava 앱을 켜고 고도는 어땠는지, 내 페이스는 어땠는지, 심박과 케이던스는 어땠는지 아주 구구절절이 데이터를 씹고 뜯고 맛봐야 함은 물론이다.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한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