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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Apr 06. 2023

나의 레이스데이는 언제나 맑음

D-218 달리기 인생 3년 만에 첫 우중런

일본어에는 "하레온나/ 아메온나"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맑음 여자/ 비여자 가 되겠다. 남자라면 "하레오토코 / 아메오토코"가 된다. 


학창 시절에 보면 꼭 그런 전설 하나씩은 갖고 있는 학교들이 있었다. 우물자리가 나빠서 소풍날마다 비가 온다던가, 아니면 좀 더 과격한 스토리가 되어 먼 옛날 선배가 우물에 몸을 던졌다던가... 

하레온나/ 아메온나는 그것의 개인버전 정도가 되겠다. 소풍이나 중요한 외출에 이 사람이 끼면 반드시 비가 온다거나(아메온나), 아니면 반대로 있던 비 예보도 없어지는 사람(하레온나)을 일컫는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맑은 날도 궂은날도 있었기에 딱히 어느 쪽도 아닌 아열대성기후 여성으로 살아왔다. 그런 어느 날! 큰마음을 꿀떡 먹고 나간 주말 그룹런은 출발조차 하기 전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고,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스몰톡의 일환으로 "나 비 오는 날에 달리기 하는 거 처음이야"라고 했더니 다들 턱이 빠지게 놀란다. 한국에서 온 아열대성 기후 여성은 의외로 달리기에서만큼은 건조기후 여성이었던 것이다.



1년간 11번의 레이스
모두 맑음


달리기를 시작하고 근 3년이 되도록 늘 야외에서 달렸지만 비 오는 날 달려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이건 참 쉬운 일이다. 비가 오는 날은, 안 뛰면 되는 것이다. 한국처럼 장마가 있는 기후가 아니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도 일주일에 3번 이상은 꾸준히 달릴 수 있다. 


그런데, 대회날은 내가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니 상황이 다르다. 2022년에 나는 뉴욕시티 마라톤 참가권을 얻기 위해 NYRR의 대회를 9번 뛰었고, 주최 측이 다른 하프마라톤을 두 번 뛰어 총 11번의 대회를 뛰었는데 그중 한 번도 비가 온 적이 없다. 대회를 접수했다가 비가 와서 안 가고 기권한 적도 없고 전부 다 뛰었는데도 그렇다. 

딱 한 번, 대회날에 비가 온 적이 있지만 천둥을 동반한 폭우경보가 나오는 바람에 대회 자체가 취소되었다.


또 한 번은 타 지역에 하프 마라톤 대회 원정을 갔는데, 대회 하루전날 차를 운전해서 가는 내내 비가 왔다. 미국의 어마무시한 스케일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가도 가도 똑같은 고속도로를 5시간 달리는 내내 비가 왔지만 대회가 열리는 목적지에 다가가자 거짓말처럼 비구름과 맑음의 경계선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주 쾌적한 영상 10도에 약간 흐리다가 햇빛이 나오는, 거의 뭐 "하프마라톤 전용 날씨"가 펼쳐졌다.


심지어 나는 작년에 대회에서 자원봉사도 두 번 했는데 둘 다 날씨가 괜찮았다. 이쯤 되면 "앞으로 쟤가 나가는 대회를 나가자"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첫 우중런
해방감 후에 찾아온 억압


사실 내가 비 오는 날 달리기를 안 하는 이유는 옷이 젖는 게 싫어서가 아니다. 어차피 땀으로 젖는 옷, 비 맞아서 젖는다고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얼굴이며 머리며 원래부터가 자고 일어난 모습 그대로 나가 뛰는 생활이라 비 좀 맞는다고 더 못생겨질 것도 없다. 


하지만 신발이 젖는 건 얘기가 다르다. 정확히는 신발 속 양말이다. 보송보송한 발로 뛰어도 뛸까 말까 한 장거리를 젖은발로 뛴다는 건... 장마철 출근길에 실수로 한 스텝 꼬이는 바람에 발이 젖어본 적이 있는가. 그 발로 하루종일 앉아만 있어도 찝찝한데, 심지어 그 발로 계속 뛴다고 상상해 보라...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신발에서 물이 쭉쭉 짜여 나오는 느낌은 또 어떻고 말이다. 

우중런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이 느낌을 아는 이유는? 우리 동네에 상습적으로 범람하는 호수가 있기 때문이다. 비 온 다음 날 맑게 개인 하늘만 보고 안심하고 달리러 나갔다가 발목까지 빠지는 경험을 한 이후로는 어휴. 그냥 길이 좀 축축하기만 해도 돌아가야 상책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옷이 젖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신발은, 아니 양말은!! 절대 안 된다.


내 비록 모자 셔츠 바지, 거기에 빤쓰까지 내어드리더라도 

이것만은 안되옵니다! 양말만은 아니되옵니다!!라고 도끼눈을 뜨고 옆으로 쓰러지면서 절규라도 하고 싶을 만큼. 정말 싫은 것이다.


출발 전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길래 그냥 오늘 하루 달리기 쉴까? 하는 유혹이 잠시 들었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그날이 아니면 장거리를 뛸 시간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강행하기로 했다. 내 마음속에선 내심, '이 몸이 달리러 나가는데 어디 감히 비가 오겠어. 좀 오다가 말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지금껏 여러 번의 대회가 그러했듯이, 있던 비예보도 없어지는 그런 작은 기적이 나에게 늘 일어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번엔 약빨이 먹히지 않아서, 출발할 때 부슬거리던 비는 우리가 다리를 건너 맨하탄으로 들어가자 장대비가 되어 죽죽 쏟아졌다. 

그런데 그게 의외로... 괜찮네?

다 큰 어른들이라고 하기엔 이미 조금 늙어버린 우리들이었지만 비를 맞으니 왠지 신이 나서 어린애들처럼 별것도 아닌 말에도 웃음이 터지곤 했다. 이것이 바로 우중런만의 특권이라는 '해방감'인가!! 비가 와서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어 달리는 쾌적함이 두 배 이상이었다. 시원한 비를 맞은 덕에 달리면서 오른 열이 식는 것도 메리트였다. 


그렇다면 빤쓰보다 소중하게 끝까지 지키겠노라 절규하던 양말의 상황은...?

물론 이런 날을 위해 우리 러너들은 신발장 속에 우천화 하나씩은 품고 사는 게 아니겠느냔 말입니다. 우천화는 미끄럼 방지 기능이 탁월하고 약간의 방수가 되는 신발인데 단점은 방수재질인 만큼 통풍이 나쁘다는 점, 그리고 선택의 폭이 좁다는 점이 있다. 물론 장화처럼 방수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 웅덩이에 빠지면 빤쓰보다 귀하게 지켜내던 양말은 그대로 꼬르륵이다. 


의외로 우중런도 괜찮은 거구나 생각하면서 10 마일 런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양말은 나름 보송하게 지켰는데 발가락이 처참하다.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고 그 자리에 또 생기고 난리... 우천화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 과내전용 안정화를 신어야 되는 나도 우천화는 일반신발이라서 그렇다.

우천화는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일 때만 신기 때문에 6개월에 한 번씩 바꾸는 일반 러닝화와 달리 한 켤레로 벌써 3년째 신고 있다. 요즘은 과내전화도 우천화가 나왔다던데 이거이거 한 켤레 새로 장만해야 되는 게 아닐까? 아니 이 몸이 올해 다른 것도 아니고 풀코스 마라톤을 뛰실 몸인데, 앞으로 장거리 훈련도 많이 해야 하니 말이야~ 

새 신발 사기에 아주 좋은 구실이 생겼다며 내심 흡족한 첫 우중런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시원한 비를 맞으며 해방감을 만끽한 대가로 나는 내장 속에서 일어난 엄청난 교통정체와 억압당한 돌덩이 변으로 고통받아야만 했다.... 


비를 맞으며 달린 탓에 땀을 얼마큼 흘렸는지를 모르고 수분섭취를 제대로 하지 않은 대가였다.


앞으로 우중런 해방감을 느낀 후에는 내장의 해방을 위해서도 수분섭취를 잊지 말자. 정말 뼈아프게 (아니, 괄약근 아프게?) 깨달은 첫 우중런이었다.



초급기종에서 중급기종으로 시계를 바꾸니 리커버리 타임까지 나오네! 53시간 동안 달리기를 안 할 명분이 생겼다 아입니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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