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뉴욕마라톤 챕터 2
인생에서 한 번은 뉴욕 마라톤을 뛰자
그 후....
인생에서 한 번은 뛰어보자는 각오로 시작한 뉴욕마라톤을 완주하고 말처럼 "한번" 뛰었으니 이제 달리기를 접었느냐 하면, 그 후로도 소소하게 대회도 뛰고 근근이 달렸다. 마라톤을 한번 뛰고 나면 한 한 달은 몸져눕는 건 줄 알았더니 의외로 한 3일 후에는 가벼운 조깅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었고 2주 후에는 대회도 뛰었다. 그러다 보니 또 한 번 9+1을 완수하게 되어 2024년 뉴욕마라톤 참가권도 획득했다.
그래서,
인생에서 한 번은 뛰자고 했던 그 마라톤을 올해에 다시 한번 뛰게 되었다. 물론 첫 완주 피니쉬라인을 통과하는 그 순간에 이미 직감한바였다. 앞으로도 나는 이 자리에 수도 없이 돌아올 것이다.
2024년 뉴욕 5구 그랑프리
첫 번째, NYC 하프
그렇게 다시 신발끈을 조여 보는 2024년.
2023년에는 오로지 뉴욕마라톤 완주가 목표였다면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다. 바로 뉴욕 5구 그랑프리로 불리는 5보로 시리즈 완주, 그리고 거기에 더해 뉴욕마라톤이다. 5개의 뉴욕 5구 시리즈 메달과 뉴욕마라톤 메달을 전부 모으는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는 달리기 붐이 상당해서 원래도 쉽지 않던 대회 참가신청이 더더욱 어려워졌다. 오죽하면 대회를 뛰는 것보다 참가신청하기가 더 힘들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원래부터 5 보로 시리즈는 완주 자체보다 5개의 모든 대회 참가권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 작년에 나는 4개만 뛰었다.
그때 참가권이 없어 뛰지 못했던 NYC 하프마라톤을 올해 첫 대회로 뛰었다.
풀마라톤과 하프마라톤을 동시에 개최하는 대회도 있는 반면 11월에 열리는 뉴욕마라톤은 풀코스만 진행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3월에 열리는 이 대회가 바로 뉴욕마라톤의 하프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회 규모는 2만 5천 명, 참가권은 게런티드 (전 해에 5보로 시리즈 중 4개 이상 완주자), 지역배당 추첨, 기준기록 보유자, 기부금 등으로 11월 뉴욕마라톤과 거의 비슷하다.
대회 규모가 큰 만큼 엑스포가 열린다. 여기서 배번과 기념티셔츠를 수령하고 기타 오피셜 굿즈를 살 수도 있다. 포토존도 많고 코스 전략 강의도 틈틈이 열린다.
참가규모가 2만 5천 명인데 출발그룹이 무려 5개로 나뉘어있다. 뉴욕 5구 시리즈 중 두 번째인 브루클린 하프는 2만 명인데 출발그룹은 2개로만 나뉜다. 왜 이렇게 출발그룹을 잘게 나눴는가 했더니, 브루클린 로드에서만 달리는 브루클린 하프와 달리, 브루클린에서 출발해 맨해튼까지 가야 하는 NYC 하프는 다리를 건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리가 생각보다 엄청난 고난이었는데....
해마다 NYC 하프는 날씨가 추워서 급수대 근처에 얼음이 생겨 넘어지는 사고에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올해는 날씨가 포근했다. 그래도 출발 전에는 춥기 때문에 출발선에 두고 나올 옷(나중에 자원봉사자들이 수거해 기부한다)이나 힛시트, 판초 같은 것을 입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이 다른 대회이기 때문에 택배회사인 UPS가 물품을 접수해 옮겨준다. 나는 보통 대회날에는 맨몸으로 갔다가 그대로 집에 오는 편이지만 이번엔 날씨가 애매한 관계로 완주 후에 입을 겉옷을 챙겨 맡겼다. 짐을 실은 트럭이 우리보다 먼저 출발하기 때문에 일찍 가야 한다.
짐을 맡긴 후에는 공항처럼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올해는 특히 보안이 강화되어서 출발 대기구역에서 마실 물도 용량에 제한이 생겼다. 물론 출발 대기구역에서 물과 게토레이가 제공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걱정을 해야 한다면 바로 화장실일 것이다. 20km가 넘는 먼 길을 가는데 화장실은 들렀다 가야지 싶으면서도, 대회를 가면 늘 있는 그 이동식 화장실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고, 심지어 줄도 길어서 출발 대기시간 = 화장실 대기시간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여차저차 시간이 지나 내가 속한 출발그룹인 웨이브 2는 출발선으로 이동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웨이브 2는 다시 A부터 F까지로 나뉘고 해당 대기구역에 서서 기다리다가 앞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대회는 처음 뛰었지만 코스는 대부분 익숙한 경로다. 내가 늘 뛰는 프로스펙트 파크에서 출발해서 맨해튼브리지를 건넌 다음 FDR(서울의 강변북로 같은 도로)를 지나 맨해튼 중심지인 타임스퀘어를 통과해 센트럴파크로 들어가면 된다. 늘 그렇지만 모르는 길에 비해 아는 길은 짧게 느껴지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없었다. 아니 이 몸이 풀 마라톤도 뛴 몸인데 고작 하프를 못 뛰겠어? 하는 자만심도 어느 정도 있었다. 뉴욕마라톤 이후 트레이닝을 딱히 하지 않았지만 간간히 장거리도 뛰었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꾸준히 달렸기 때문에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무난하게 완주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목표기록은 2시간이었다. 작년 10월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다리를 약간 다친 상태로 1시간 55분에 완주했으니 트레이닝이 안된 상태라도 2시간은 될 거라는 심산으로 페이스를 설정하고 출발했다. 초반 3마일이 경사가 심했지만 계획한 페이스대로 순조롭게 가는가 싶었는데....
맨해튼 브리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망했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맨해튼 브리지는 평소에도 종종 뛰는 다리다. 뉴욕에 있는 브리지들은 전부 다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가 있어서 업힐은 당연히 예상한 바다. 하지만 맨해튼 브리지는 가운데 볼록함이 그렇게 심한 다리는 아니라서, 아직 힘이 안 빠진 초반에 건너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 지! 만!
평소 다니는 보행자 통로는 1층, 대회 코스로 지정된 것은 평소 차량이 다니는 2층. 도로에서 다리로 진입하는 초입의 경사가 너무나도 심했다. 거기에서 페이스를 잃고 시간이 지체되기 시작했는데,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라는 진리를 떠올리며 후반에 회복할 거라는 믿음으로 꾸준히 뛰었다. 물론 후반에 어느 정도는 시간을 회복했지만 여기서부터 늦어진 페이스는 FDR에서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자동차 전용도로인 FDR은 왼쪽에 맨해튼, 오른쪽에 바로 강이다. 서울의 강변북로와 똑같다고 보면 된다. FDR구간은 약 3마일이었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강물만 보며 달리기가 여간 지루한 게 아니었다. 나는 업힐의 빡셈보다 지루한 코스에 약한 타입으로, 페이스가 속절없이 느려졌다. 주변에 건물이나 나무가 있어야 내가 뛰는 속도를 체감하며 뛰는데 의외로 강변에 바짝 붙여 건물을 짓지 않는 맨해튼 특성상 왼쪽으론 황무지 같은 것이 있고 오른쪽으론 강물만 철썩거리고 있다. 물론 그 너머로 브루클린의 건물들이 보이긴 하지만 너무 멀어서 내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계에 찍히는 페이스를 보니 혹시 고장 난 건가 싶을 만큼 느려졌다. 그리고 7마일 지점을 통과할 때 이미 목표시간에서 2분 이상이 늦어져있었고, 회복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생각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2분을 후반에서 단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때부턴 더 힘이 빠졌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갓길로 붙어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풀코스 마라톤 코스에서도 걷지 않았던 내가 하프마라톤을 겨우 절반 뛰고 걷고 있다. 헛웃음이 났다.
또 하나 큰 실수가 있었다. 7마일이 지났으니 젤을 먹어야했다. 6마일 지점에서, 늦어도 7마일에서는 먹었어야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단것이 먹기 싫었다. 안 먹고싶다고 안 먹을 수 있는 간식같은것이 아닌데. 당기지 않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젤을 안 먹다가 10마일 지점에서 도저히 허기가 져서 안되겠어서 먹었지만 이미 많이 늦은 상태였다. 주유소에 들르기 귀찮다고 기름도 안 넣고 차를 계속 운전 할 수 없듯이, 장거리 달리기에서는 에너지가 고갈되기 전에 채워야하는것은 상식이다. 대회가 아닌 주말 장거리연습때는 안 먹고도 뛰긴 하지만... 이미 목표시간에 도달하지 못할거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느슨해지고 대회를 대회로 생각하지 않고 막 뛰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례했던것 같다. NYC 하프마라톤이라는 대회에 대한 경의가 부족했다. 한 대회 한 대회를 소중히, 최선을 다해 뛰는것이 기록보다 중요한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자만했었다. 처음 하프마라톤을 뛸 때는 훈련을 풀마라톤처럼 했었다. 12주간 쉼 없이 인터벌, 템포, 장거리를 매주 했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부상을 입을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었다. 그런데 풀 마라톤 한번 뛰었다고 하프는 훈련 없이도 완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꾸준한 트레이닝을 통해 체력이 올라가고 하프를 겨우 완주할 수 있었던 내가 마라톤을 완주할 만큼의 체력이 생기게 해 줬던 마라톤 트레이닝 16주. 16주의 노력은 사람을 그렇게나 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면 16주의 게으름은 그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뉴욕마라톤 이후 4개월.
날씨가 추워서, 눈이 와서, 감기가 걸려서... 이런저런 핑계로 휴식의 달콤함에 빠져있었던 시간...
16주의 훈련이 평범한 인간을 마라토너로 만들 수 있었듯, 16주의 게으름은 사람을 이렇게나 망가지게 할 수도 있는 거였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이제 다시 0에서부터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하다 보니 타임스퀘어까지 왔다. 뉴욕에서 가장 번잡한 타임스퀘어는 일 년에 딱 두 번만 교통 통제가 걸리는데 그중 하루가 12월 31일의 카운트다운, 그리고 또 하루가 바로 이날 NYC 하프마라톤 대회날이다. 양쪽으로는 빼곡하게 구경꾼들이 나와 너나 할 것 없이 응원을 보내준다. 이거지! 이게 바로 뉴욕에서 마라톤 뛰는 맛이지! 하며 위풍도 당당하게 타임스퀘어를 바람처럼 뛰어 지나고 싶은 것은 마음뿐. 발이 올라가지 않을 만큼 지쳤다. 내 다시는! 다시는!!! 트레이닝 없이 하프마라톤을 뛰지 않으리라. 다시는 자만하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을 하며 바위산 센트럴파크를 굽이굽이 뛰어 저 멀리 피니쉬라인이 보이는 순간...
아아아...
지금껏 내가 하프 마라톤 코스에서 한 번도 본적 없는 숫자가 시계에 찍혔다.
2시간 13분 ㅠㅠ 지금까지 내가 뛴 하프마라톤 중 가장 느린 하프마라톤으로 2024년을 시작했다.
부끄럽고, 또 한편으론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분통이 터졌다. 7마일 지점에서 2분이 늦어졌다면 그대로 페이스를 유지해 2시간 2분에 끝냈어야 했다. 2분이 늦었다고 '어차피 안될 거'라는 생각으로 코스에서 걸었던 스스로에게 정말 많이 실망했다.
기록이 부끄러워서 그냥 메달이고 뭐고 숨겨놓고 '나 NYC 하프 안 뛰었다'라고 덮어버릴까도 생각했다. 몸보다 마음의 후유증으로 이삼일을 앓고, 주섬주섬 메달을 꺼내서 한번 들여다본다. 그리고 일부러 더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았다.
잊지 말자. 스스로에게 느꼈던 실망감.
잊지 말자. 무거웠던 발걸음.
잊지 말자. 하프마라톤이라고 노력까지 반만 해도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다시.
앞으로 달릴 5구 시리즈, 그리고 뉴욕 마라톤.
한걸음 한걸음 다시 쌓아 올려 차곡차곡 강해질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며... 내 생애 가장 느린 하프마라톤에서 가장 큰 것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