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는 쉬운편이다. 경사가 쉼없이 반복되는 센트럴파크에서 하는 대회(4월 우먼스 하프)도 아니고, 다리를 건너 맨하탄으로 가야하는 대회(3월 NYC하프)도 아니다. 피니쉬 지점인 코니아일랜드는 이름은 아일랜드지만 나중에 간척사업으로 메웠기 때문에 뉴욕에서 하는 대회의 가장 큰 난관인 다리가 없는 대회다. 지대가 높은 지역에서 출발해 해안을 향해 내리막으로 달리는것도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초반 5마일까지는 오르막이 크게 있고 좌우로 턴도 많이 있어서 체력 안배에 주의해야한다. 이 대회를 반대방향으로 뛴다면 정말 힘들겠지만 다행히도 후반 10Km가 거의 계속 내리막이라서 초반에 오버페이스만 하지 않으면 크게 고통스럽지 않은 코스다.
그래서 나의 계획은 지형이 험한 초반 6마일을 1시간에 뛰고, 나머지 7마일을 1시간에 뛰어 두시간에 완주하는것으로 잡았다. 전반보다 후반을 빠르게 뛰는 [네거티브 스플릿]은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페이스업을 해야하는 부담이 있지만 지형조건이 좋기 때문에 도전해보기로.
대회날 아침까지 두통이 계속 있어서 아스피린을 두알 먹고 출발했다. 날씨가 덥진 않았지만 춥지도 않아서 가방도 맡기지 않고 대회복장 그대로, 겉에 얇은 비닐 우의만 입고 출발 지점인 브루클린 뮤지엄으로 향했다.
우리의 홈그라운드 경기다보니 같은 클럽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 같은 대기구역 (i 코랄)에도 열명 이상은 있었던 것 같다. 그 중 릴리안이라는 언니가 자기는 오늘 2시간을 목표로 생각하는데 같이 뛰겠느냐고 말을 건네왔다. 물론 나도 2시간이 목표이긴 하지만 오늘은 두통이 있어서 약을 먹은 상태라 잘 모르겠다고 사양했다. 대회 출발구역에서 느껴지는 도파민 과다분출을 느끼며 대기...
국가제창과 뿔피리 소리를 기점으로 AA(선수)부터 차례로 출발했다. 대회규모가 정말 커서 내가 속한 i그룹이 출발할때 건타임 시계를 보니 7시 17분이었다.
초반 1마일은 내리막이지만 웜업이 안 된 상태라 천천히 뛰는데도 숨이 찼다. 그리고 첫번째 오르막이 나오는데 이미 많은 러너들이 나를 제치고 앞으로 가고 있었다.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내리막으로 3마일을 지나 프로스펙트 파크 안으로 들어가 한바퀴를 뛰고 나온다. 맨하탄에 센트럴파크가 있다면 브루클린에는 프로스펙트 파크가 있다. 다만 이 공원의 특징이 있다면 굽이굽이 언덕이 나오는 센트럴파크와 달리 공원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한쪽방향으로 계속 오르막, 그 후에 계속 내리막이라는 점이다. 브루클린 하프는 이 공원에서 지대가 가장 낮은 지점으로 들어가서 쭉 오르막, 그 후에 쭉 내리막을 뛰어 공원을 빠져나오도록 되어있다.
프로스펙트 파크는 내가 일주일에 세번은 꼭 뛰는 동네 앞마당같은 곳이다. 평지같이 보여도 사실은 오르막인 구간이 있다는 것도 정확하게 알고있다. 눈으로 보기엔 평지같은데 몸이 점점 무겁게 느껴져서 '슬슬 지치는건가' 싶은 순간에, 사실은 오르막을 뛰고있다는것을 '안다'는 것 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된다. 그렇게 달려 5마일 지점에 있는 가장 급격한 오르막이 눈앞에 보였다.
대회를 가면 낯익은 얼굴들이 있다.
다 알파벳 코랄배정 시스템 때문이다. 배번 앞에 붙는 알파벳은 직전 대회 기록은 아니고 과거 2년 사이에 가장 잘 뛰었던 대회 기준으로 배정된다. 그러니 매번 비슷비슷한 사람들을 대기구역에서 만난다.
똑같은 기록을 갖고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달리는 수준도 고만고만하다.
그 말은, 같은 그룹 사람을 제치거나 제쳐지는일이 잘 없다는 뜻이다.
나는 대회를 가면 언제나 코트니(여)와 세자르(남)의 등을 보며 뛴다. (정확히는 얘네들이 입은 우리 팀 유니폼 등에 새겨진 팀 로고를 보며 뛴다)
신기하게도 얘네들은 언제나 내 10미터 앞에 있고,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정말 놀라운 점은 내가 작년에 기록 갱신을 많이 해서 G에서 F를 지나 E 까지 올라갔는데!!! 이제는 내가 걔네들보다 앞에서 출발하겠지 싶은데도 아직도!!!! 뛰다보면 10미터 앞에 걔네들이 있다. 걔네들도 나와 같은 일정으로 트레이닝을 하면서 똑같이 기록 갱신을 하고 똑같이 앞그룹으로 올라간 것이다. (!!!!)
코트니는 장거리 대회를 뛰어도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지 않고 물을 가지고 뛰는 타입이다. 나는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는데 뛰면서 마시지 못하고 멈춰서서 마신 다음 다시 뛴다. 그래서 코트니는 내가 물을 마시는 사이에 나를 제치고 가고, 내가 다시 따라잡는 식으로 엎치락 뒤치락 한다.
세자르는 솔직히 얼굴도 몰랐다. 얘는 물 마시는 타이밍도 습관도 나랑 똑같아서, 항상! 정말 항!상! 내 앞에 있다. 히스패닉 특유의 둥글고 두툼한 상체 실루엣을, 그냥 10미터 뒤에서 계속 보면서 뛸 뿐이다. 작년에 9개의 대회를 뛰었는데 거의 모든 대회에서 내 앞 10미터에 있었다. 세자르가 물을 마시는 사이에 내가 앞으로 제치고 가면서 얼굴이라도 보고싶었는데, 걔가 물을 마시면 나도 마셔야하는 타이밍이라는게 절묘했다. 당연히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는데 뒷모습은 엄청 많이 봐서, 연말 행사때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너구나!!" 싶었다. 그래서 내가 가서 "너 나 알아?"라고 물어봤다. 세자르는 모른다고 했다.
당연히 모르겠지. 나는 항상 니 등 뒤에 있으니까!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피보다 진하다는(?) 페이스가 같은 사람들의 끈끈한 유대감으로 금세 친해진 친구.
5마일 표식을 지남과 동시에 프로스펙트 파크의 가장 험한 언덕 구간에 들어간다. 눈으로 봐도 경사가 엄청나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을때는 이 언덕을 뛰어서 넘지도 못했다. 그리고... 코트니와 세자르가 10미터 앞에 보였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진다..... ?
가까워진다.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내가 얘들을 제치고 나가려고 한다. 그것도 이 언덕에서???!!!
덜컥 겁이 났다.
코스에서 한번도 제쳐본적이 없는 세자르를, 평지도 아닌 오르막에서 제치려고 하는 찰나에, 어쩌면 내가 지금 오버페이스를 하고있는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고작 5마일이다. 앞으로 가야할 거리가 8마일이나 남았는데 또 지쳐서 걷고싶지는 않다. 늦춰야한다 속도를. 내가 지금 너무 빠르게 뛰고있다.
그 순간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자원봉사를 나온 팀원이었다.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보려는 순간 영화에서 나오는 슬로우 신처럼 내가, 코트니가, 세자르가, 자원봉사를 나온 팀원이..... 그렇게 스쳐지나가면서 나는 처음으로 코스에서 세자르를 제쳤다.
언덕길을 기어오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버페이스 하고있는가? 아니.
이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가? 예스.
나는 뛰어오른다. 이 언덕을.
왜냐면,
할 수 있으니까.
다시 제쳐진다면? 상관없어.
나는 코트니를 이기기위해 이 대회를 뛰는게 아니다. 나는 세자르보다 빠르게 뛰기 위해 이 대회를 뛰는게 아니다. 내가 지금 제친것은 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 내가 그들보다 빠르게 뛸 수 없다는 막연한 불안감.
인터벌, 템포, 너무 힘든데
이거 하면 빨라지는거 맞지요?
이 질문에 우리 팀 코치는 답했다.
트레이닝은 빨라지기 위해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가 갖고있는 페이스에 대한 공포감을 이기는 훈련이라고.
사실 나는 대회에서 그들의 등을 보며 뛰는것이 싫지 않았다. 거리가 길면 길수록, 사람이 많은 큰 대회일수록, 로드 위에서 나는 너무나도 고단하고 또한 고독하다. 지치면 지칠수록 보폭이 줄어들고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 앞을 보고 뛰어야 하는데 자꾸만 땅만 보인다. 그 때 고개를 들어 10미터 앞에 늘 있는 그들의 등을, 등에 새겨진 팀 로고를 바라보는것 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그들이 변함없이 10미터 앞에 있다는 것은, 내가 오버페이스 하지 않았다는 뜻임과 동시에 뒤쳐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맞게 뛰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이정표였다. 적어도 "틀리지는 않았다"는 안심감의 증표였다. 그리고 그 언덕에서, 처음으로 코스에서 세자르의 "얼굴"을 보고 지나가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과 스스로를 가두던 창살이 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코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서, 세자르는 남자라서, 여자인 내가 그들보다 빠르게 뛸수는 없다고 스스로 단정지었던 막연한 한계점. 적어도 그들보다 뒤쳐지지 않고 끝까지 10미터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스스로의 굴레.
6마일 지점에서 "나 오늘 목표 2시간인데 같이 뛸래?"하던 그 언니의 등이 보였다. 그 말은 2시간 목표 페이스보다 빠르게 뛰고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겁먹지 않고 앞으로 치고 나갔다. 왜냐면, 나는 할 수 있으니까.
남들의 페이스에 맞추지 말라는 진부한 말
진짜로 "페이스"가 중요한 장거리 달리기를 해보면 안다.
'저 언니는 나보다 잘 뛰는 언니인데...' 그 언니 페이스보다 빠르게 뛸 수 없을거라는 불안감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남의 페이스에 맞추는 격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 코스에서 그 세명을 다시 만나는 일 없이 (제쳐지는 일 없이) 골인했다.
시간은 목표했던 2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아쉽게도 2시간 1분 58초였다.
1마일 남은 지점에서 최고 페이스까지 끌어올리면 2시간 1분 미만까지 가능했지만, 서브2는 불가능해보였다. 이래서 내 친구들이 나보고 마지막에 시계를 보지 말라고 한다. '어차피 목표달성 안될거 편히 가자'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순간 속절없이 페이스가 느려진다. 이것도 차차 고쳐나가야 할 부분임을 인식하면서...
아직도 개인 최고기록까지 7분이나 남았지만
(!!!)
그렇다, 나는 한때 하프마라톤을 1:55에 뛰었었다....
한발 한발
더 나은 나를 향해, 더 용감하고 강한 나를 향해 다가가는 한해로 삼기로.
스스로에게 100점을 주고싶었지만, 마지막 1마일에서 느슨해졌던 정신력 때문에 10점 빼고 90점만 주겠다.
ㅋㅋ
평생 운동치 몸치로 살아온 여자의
인생 첫 마라톤 도전기 [인생에서 한 번은 뉴욕마라톤을 뛰자] 매거진에서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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