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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May 21. 2024

브루클린 하프 2024 - 스스로에게 떳떳한 마라톤

문득 생각나서 지금까지 하프마라톤을 몇번 뛰었는지를 세어보니 8번이다. 그 중에서 이 브루클린 하프는 내가 작년에도 뛰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같은 대회를 두번 뛴 하프마라톤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여행했던 외국의 도시를 몇년 후에 다시 방문했을 때, '저기서 저 모퉁이를 돌면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지' '여기서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었었지' 하며 신기하게도 엊그제일처럼 기억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 이 브루클린 하프마라톤이 그러했다.



작년 이 브루클린 하프를 뛸 때는 내 생에 세번째 하프마라톤이었다. 물론 당시 마라톤(풀)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하프마라톤은 정말 큰 대회였다. (지금이라고 하프가 우습다는 뜻은 아니다. 그 당시 나는 21km의 하프마라톤 너머로는 단 한발자국도 내밀지 못할거라고 굳게 믿고있었다는 말이다)

훈련도 열심히 했었는데 아쉽게도 마지막 3주를 앞두고 다리가 아팠다. 다들 뛰지 말라고 했지만 굳이 굳이 그걸 뛰었던 기억이 난다. 다리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코스 급수대에서 진통제를 먹고 스트레칭을 해가며, 마지막엔 비까지 맞으며 뛰었던 그 대회.



그리고 1년 후 나는 마라톤 완주자가 되어 다시 출발선에 설 수 있었다.






작년 이 대회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이유 중 하나는 출발 2조 (wave 2) A에 배정받았던 기억이다. 로드러너스의 대회는 언제나 기존 기록을 바탕으로 알파벳이 붙고 그 순서대로 출발한다. 큰 대회는 다시 wave 1, 2로 나눠 시간차를 두고 출발한다. wave 2는 아쉬웠지만 맨 앞에서 출발하는 A였기 때문에, 평소 내가 코빼기조차 보지 못했던 선두 유도 오토바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 뒤로 있는 만5천명의 러너를 리드하며 달리는 엄청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리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뒤로 빠져서 뛰었던 애석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년에 마라톤 훈련을 하면서 기록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wave 1이 되었다. 웨이브에 따라 번호표 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엑스포에서 노란색 웨이브 1 번호표를 수령할때 나름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석연찮았다... 





브루클린 하프마라톤 엑스포 (공식명칭 프리파티) 브루클린 하프마라톤은 엑스포를 프리파티, 대회를 파티, 대회 후 행사를 애프터파티라고 부른다.

작년 뉴욕시티 마라톤에서 생애 첫 마라톤을 완주한 후, 이런걸 두고 번아웃이라고 하는것인지 도통 달리기에 불이 붙지 않았다. 주1회 하는 그룹 트레이닝도 새벽 6시 반에 추워서 못한다는 이유로 안 가고, 주말 장거리도 뛰다 말다 했다.



1월부터 거의 매달 하프마라톤 대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교만한 마음도 생겨서 '하프는 어떻게든 뛰겠지' 하며 제대로 훈련을 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가 처참하게 나타났던 3월 NYC하프... 하프마라톤 코스에서 두번이나 걷고, 지금까지 내가 뛴 모든 하프마라톤 중에서 가장 느린 기록을 만들어버렸던 그 NYC하프 이후로 반성도 많이 했지만 자신감을 잃은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에 배정받은 Wave 1 i 조는 뒤로 J,K,L 3그룹만 있는 거의 꽁무니 그룹이다. 꽁무니인건 상관이 없는데, NYC하프때 코스에서 터덜터덜 걷다보니 내 주변으로 사람이 아예 없는 (!!! 그렇다. 웨이브 맨 끝까지 쳐졌던 것이다) 상황을 겪고나니 더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언제나 말하지만 딱 "중간" 러너이기 때문에 항상 주변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상태로 뛰고 피니쉬도 가장 많은 사람이 동시에 피니쉬하는 소위 "피크타임" 피니셔다. 



아무도 없는 코스를 '걸었던' 기억, 그래서 더더욱 앞으로 가고싶었던 절박함, 하지만 도무지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NYC하프 그날의 기억... 

그래서 나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는지 대회 며칠 전부터 두통이 가시질 않았다. 




자기보다 빠른 그룹과 출발하는것은 금지되어있지만, 느린 그룹과 출발하는것은 자율이다. 그럼 wave 2 A조와 출발하는게 좋지 않을까??? 그럼 작년에 못해본 '1등같은 착각'을 느껴볼수도 있고, 얼마나 좋아!! 

정말 엄청난것을 발견한 양 갑자기 힘이 쑥 솟았다. 그래!! 웨이브2로 가자!! 




하지만 막상 대회 하루 전이 되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웨이브 2 러너가 된다는게 부끄럽다는 뜻이 아니다. 노란색 웨이브 1 번호표를 달고 웨이브 2 출발선에 선다는것이, 웨이브 2 러너들을 모욕하는게 아닌가 싶어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훨씬 더 빨리 뛸 수 있지만, 1등이 되기 위해 여기에 섰어!' 라고 소리쳐 말하는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웨이브 1 i 그룹에 배정받게된 기준 기록은 내가 작년에 마라톤 훈련을 하며 체력이 피크에 달했을 때 뛰었던 대회에서 나온 개인 신기록이다. 물론 6개월이나 지난 지금은 절대 그렇게 뛰지 못한다. 하지만 어쨌든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만든 기록이고, 그 후로 체력이 떨어진것도 스스로의 책임. 

웨이브 1의 꼴찌가 되어 아무도 없는 코스를 터덜터덜 걷게 된다면 그것 또한 나의 책임. NYC 하프에서 느꼈던 그 고독과 분노를 다시한번 느껴야 한다면 다시한번 느끼자. 그것이 나에게 무엇보다도 큰 양분이 될 것이다. 




그런 각오로 7시에 출발하는 웨이브 1 대기줄에 섰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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