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많음 주의
투표날이다. 사전투표는 31.3%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 투표율을 갱신했고, 사전투표와 본투표율이 합산되는 오후 1시 기준 53%를 돌파하며 21대 총선을 3~4% 차이로 앞지르고 있다. 지난번 조국혁신당의 돌풍 원인에 대한 글을 쓴 바로 다음 날 지역구와 비례대표 후보 정당들의 공보물이 도착했고, 이번에는 공보물 브랜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번 비례대표 후보 정당은 총 38개다. 가가호호공명선거대한당이나 히시태그국민정책당처럼 무슨 생각으로 당명을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정당들도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정당 중 공보물을 제출한 곳은 딱 반절인 20개 정당이다. 혹시나 하고 20개 정당의 공보물을 모두 훑어보았지만, 마케팅적으로 논할 가치가 있는 곳은 결국 더불어민주연합, 국민의미래, 녹색정의당, 새로운미래, 개혁신당, 조국혁신당, 소나무당 등 7곳이다.
한국 영화 포스터의 역사 그 자체인 홍보사 ‘꽃피는 봄이 오면’의 김혜진 대표, ‘프로파간다’의 최지웅 실장, ‘스테디’ 안대웅 실장 등의 인터뷰로부터 좋은 포스터의 기준을 뽑았다. 논하자면 수백가지가 있겠으나, 결국은 (1) 핵심적이고 간결한가 (2) 새로운가 이 두 가지로 귀결되는 듯하다. 안대호 실장은 “코로나 이후로 작업하는 포스터는 딱 간결한 키워드 하나만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게 추세”라며 “직접적이고 쉽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이미지를 원한다”고 언급했다. 김혜진 대표에 따르면 “지겨운 포스터가 되지 않으려면 매번 조금이라도 새로워야”하며, “사소하지만 살짝 다른 그 무엇에서 참신하고 새로운 느낌이 나온다”고 한다. 이 두 가지에 선거 포스터로서 필수적인 (3) 가독성의 기준을 추가하여 평해보고자 한다.
[기준1] 간결성과 임팩트
공보물의 간결성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의하자면, ‘한 눈에 얼마나 잘 들어오는지’일 것이다. 그 점에서는 조국 대표의 개인 화보집에 다름 없는 조국혁신당 공보물 표지가 단연코 1등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조국혁신당의 당색인 파란색을 표지에서는 배제한 채 점잖은 그레로를 깔았다는 것인데, 조국 대표의 전신샷에 몰빵(?)한 듯하다. 그 다음은 역시 돈 많은 정당답게 민주연합, 국민의미래도 나쁘지 않다. 컬러도 심플하고 텍스트의 배치도 비교적 조화롭다. 그 다음 돋보이는 것은 컬트 정당(?) 소나무당의 약진인데, 손혜원 전 의원이 있는 당이라 키치하게 잘 나온 것 같다. 진보인지 보수인지 모를 색깔 조합에 급진적 공약만큼이나 대쪽같은 소나무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녹색정의당은 인물 사진은 눈에 띄게 잘 찍어서 배치했으나, 텍스트가 너무 많고 위계 정리가 안 되어 있어 간결성에서는 조금 밀린다. 새로운미래와 개혁신당은 그다지 논할 가치가 없다.
[기준2] 새로움, 즉 신선함
신선함에서도 조국혁신당의 약진이 돋보인다. 참고로 조국혁신당의 브랜딩 총괄은 문재인 정부 시절의 오필진 홍보본부장과 조덕희 아트디렉터다. 그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선명하고’ ‘빠르고’ ‘명확하게’ 기조를 유지하려 했다”는데, 그 말마따나 선명하면서도 다른 비례정당과는 다른 미감을 추구한 것이 돋보인다. 소나무당 역시 소나무 엠블렘과 함께 축구 선수 등번호와 같은 정당번호 29를 배치한 것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 다음은 국민의 미래 공보물인데, 표지는 새로울게 없으나 그 다음장에서 비례 후보들의 손편지를 하나하나 실은 디자인이 비교적 새롭다. 대신 필기체가 많이 들어가다보니 가독성을 잃었다.
[기준3]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독성
가독성은 사실상 폰트가 결정한다고 보면 된다. 고딕 계열을 쓰고 과한 변형이 없을수록 가독성은 좋고, 필기/흘림체를 쓰거나 변형이 많을 수록 눈에 잘 안보인다. 그런 면에서는 정직하게 고딕체 계열을 사용한 더불어민주연합이나 개혁신당, 조국혁신당, 소나무당 등이 가독성을 잘 챙겼다. 더불어민주연합이 손혜원 전 의원의 브랜딩 이후 유지하고 있는 노란색의 1번 기호 표시나, 개혁신당의 주황색 등은 컬러값에서도 가독성을 더해준다. 이 방면의 꼴찌는 새로운미래인데, 표지에서 일단 너무 세로로 긴 폰트를 쓰는 바람에 글자도 몇 개 안되는데 잘 읽히지 않는다. 속표지에도 폰트 종류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텍스트 간 위계 정리가 잘 안되었다.
이제 비례 정당 공보물별로 각론해보려 한다. 주로 아쉬운 점 위주가 될 것 같다.
더불어민주연합 - 가짜뉴스 유튜브 같은 폰트는 그만 쓰자.
바로 이 장표에 대한 지적을 하고 싶다. 윤석열 정권 심판 프레임을 들고 오는 것은 좋은데, 가짜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쓸 것 같은 폰트와 컬러값 때문에 진보 제1 정당인지 약간 헷갈릴 지경이다. 그 위에 사과 사진과 이채양명주도 표지와 다른 디자이너가 붙은 것 같을 지경이다. 이 페이지가 무척이나 아쉽다.
손혜원 전 의원이 만든 더불어민주당 브랜딩 걸작에서 ‘더불어’를 디자인을 변경한 것도 아쉽다. 해당 단어의 위계를 탈락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손글씨 폰트로 작게 바꾼 것 같은데, 컬러도 전체적으로 탁한 계열로만 채워져 무겁고 올드해졌다. 연녹색의 상큼함이 사라지고 민주당 당원들처럼 점점 연령이 높아지는 느낌이다.
다만 기호 1번의 노란색과 파란색 음영 디자인을 유지한 것은 잘한 것 같다. 파란색과 보색이 되면서 눈에 잘 띄고, 세련된 감성도 더해준다. 가끔 파란색 음영을 빼거나 1번 기호 크기를 변경하는 등 자꾸 마음대로 바꾸려는 개별 후보들의 포스터가 눈에 띄는데, 제발 민주당에서 정리해놓은 BI 가이드를 지키자.
국민의미래 - 손편지는 감성이 과했다.
현재 국민의힘 브랜딩 담당자가 손편지 감성을 좋아하는 듯하다. 국민의미래 공보물 뿐 아니라 국민의힘 설날 인사도 한동훈 위원장의 손편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이돌이나 배우가 자필로 연애/결혼 소식을 알리는게 아닌 이상, 팬층이 두텁지 않은 총선 비례대표 공보물에마저 손편지를 적용하는 건 별로 합당치 않은 전략 같다. 비례대표는 보통 각 필드의 전문가를 모셔오기에 팬덤보다는 전문성을 강조하는 방향이 필요하다.
녹색정의당 - 분홍색과 보라색 서브 컬러는 꼭 필요했을까?
기후, 노동 외 인권, 여성, 소수자 등 진보정당의 의제를 최대한 다양하게 가져가겠다는 방향성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것을 녹색과 노란색의 범주 안에서 보여주거나, 각 영역은 블랙 앤 화이트로 심플하게 처리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보라색과 분홍색이 들어오면서 다소 난잡해진 느낌이 난다. 가뜩이나 진보정당은 외칠게 많기 때문에 공보물이 항상 운동권의 포효처럼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조국혁신당처럼 심플함을 최대한 추구하고 그룹별로 장표를 할애하는 전략으로 갔어도 좋았을 것 같다.
새로운미래 - ????
새로운 미래 공보물에는 엄청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루리웹에서 돌아다니는 썰(?)에 따르면 새로운 미래 공보물의 오리지널 버전은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요즘 2030이 좋아한다는 레트로 컨셉을 시도한 걸까? 이걸 키치하다고 해야하는 걸까?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것을 유령 모티프로 시각화한 걸까? 정말 모르겠다. 다행히 당원들의 항의로 지금의 표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참고로 새로운미래의 가장 강력한 지지 커뮤니티 루리웹에서는 보다 못해 대신 공보물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퀄리티가 상당히 괜찮다. 새로운미래는 총선 이후에도 당이 존속한다면, 반드시 루리웹과의 공조 하에 홍보물을 뽑아냈으면 좋겠다. 기호 6번으로부터 ‘6 can do it’을 뽑아낸 것도, 그걸 캔 음료와 연결시켜 디자인한 것도 모두 루리웹 유저다.
개혁신당 - 요즘 어르신들도 이것보단 세련되게 뽑는다.
주황색을 BI 메인 컬러로 가져가는 것까진 좋았는데, 자칫 서브 컬러가 받혀주지 않으면 정말 촌스럽게 뽑히는 색깔이다. 그렇다고 폰트 디자인이 세련된 것도 아니고… 기껏 뽑아놓은 그라데이션 배경은 전혀 쓰이지도 않고… 정말 정말 신경을 안 쓴 것 같다. 더 늦게 창당했지만 너무나 잘 뽑아내는 조국혁신당과 대비된다. 게다가 공보물 표지의 인물 배치도 너무 작고 전체적으로 엉성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잘 안 읽힌다. 김종인 할아버지는 도대체 왜 가운데에 계실까? 이준석 정당이면 이준석을 조국처럼 메인에 두거나, 이준석과 양향자를 집중적으로 크게 배치하는 전략을 썼어야 했다. 뭐 하나 잘 한 게 없는 공보물이다. 정치 유튜브하는 어르신들이 눈길을 잡아 끄는 이미지를 더 잘 뽑으신다.
조국혁신당 - 대치동 1타 강사가 정치하면 벌어지는 일
전체적으로 이번 총선 브랜딩을 독식했다고 총평할 수 있다. 디자인은 세련되면서 눈길이 가고, 키치하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았다. 후보자 사진 촬영부터 컨셉과 톤앤매너에 대한 일관성을 지켜나간 것 같다. 박은정 검사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몸을 측면으로 돌린 사진은 명암까지 신경 쓰며 느와르 느낌을 낸 수작이다. 다른 후보자들의 자세도 통일된 톤 아래 차별성을 추구한 것이 오롯이 드러난다. 또한 흰색 고딕 계열 폰트를 사용해 7~8 글자로 최소화한 메시지를 시각화했다. 다만 당의 정책이 거의 윤석열/한동훈 공격 원툴이다보니 갖고 갈 메시지 자체가 가벼워서 그에 집중할 수 있었던 배경도 한 몫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