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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나나킥 Dec 15. 2015

전직 덕후의 추천

공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여행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숙소만 예약해 놨을 뿐 다른 일정은 전혀 짜 놓지 못했다. 여행안내책을 펼쳤지만 뭘 할지 막막했다.


일본에 대해 잘 아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카톡을 보냈다. 십대 시절엔 ‘아즈망가 대왕’‘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 같은 ‘므흣’한 일본 만화에 빠졌고, “나중에 여고 교사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적도 있는 친구다. 스무살 땐 그 친구를 따라 일본 애니메이션 성우를 보러 갔다가 수십명의 ‘덕후’들이 풍기는 아우라에 놀란 적도 있다.


하지만 역사 방면에서도 해박한 면모가 있었다. 명동 성당 앞을 지날 때는 “여기가 이완용이 칼 맞은 곳”이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1909년 ,이재명 의사가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러 온 이완용을 암살하려 시도한 것을 말한 거였다.   


지금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쪽에선 ‘탈덕’한 지 오래고, 어엿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 중이다.

“갑자기 왠 여행? 휴가라 함 시간되면 보려고 했는데ㅋㅋ”

친구도 마침 군 휴가를 나와 있었다. 자대배치 전 “출퇴근 시간도 보장된다고 하는데 전역할 때까지 공부도 좀 하고 나와야겠다”며 ‘초긍정마인드’였던 친구는 이제 “새벽 4시까지 일 시키면서 다음날 근무취침도 보장 안 해준다”며 넋두리를 하기에 바빴다.


“나가사키 하면 짬뽕밖에 떠오르는 게 없는데 뭐 할지 막막하다.”

“핵폭탄도 맞았지ㅋㅋ. 기독교 성지도 있고 찾아보면 갈 데 많을 걸.”

친구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있는지, 띄엄띄엄 연락이 왔다. 따로 여행정보는 얻지 못하고 다시 여행책을 뒤졌지만, 당장 오늘부터 뭘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수속을 마치자마자 노트북을 꺼냈다. 직장인으로서의 여행인지라 혹시 몰라 회사 노트북을 챙겨왔다. 생각해 보니 과연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일하는 신문사는 매일 아침 7시 그날 신문 주요 내용을 요약해 독자들에게 문자로 보내준다. 전날 초판이 나오면 막내 기수들끼리 요약작업을 나눠서 한다. 혼자 여행을 가는 게 미안하기도 해서, 동기들 몫까지 했다.


요약 작업을 끝내니 시간이 촉박했다. 면세점 쇼핑 할 틈도 없었지만, 어차피 쇼핑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아쉬울 것 없이 비행기에 타러 134번 터미널로 향했다.


“구마모토에 가보는 거 어떠냐?”

비행기에 오를 즈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가사키에서 가깝고, 구마모토성은 일본 성 양식중에서도 특이하니까 잘 보셈ㅋㅋ 가토 기요마사가 진주에서 죽을 뻔 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지었다고 함”

구마모토라…이게 재앙(?)의 씨앗일 줄은 이땐 알 리가 없었다.  


편명 LJ251은 오후4시30분에 정시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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