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하 Jun 27. 2020

아날로그

그날은 어땠나요?

쉼 없는 초침은 여전히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서슬이 이토록 푸른 시계가 그땐 없었지요?


나눌 수 없을 때까지 쪼개어 다툰 결과는

산산이 조각난 우리의 심장이에요

해와 별을 읽던 당신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매일 아침 가족과 나눈 인사말

열 살 생일에 받았던 선물

기억나는 첫 여행을 함께한 사람

이젠 보이지 않게 멀어진 사랑


오랜 시계 가죽에는 주름이 져도

젊은 그리움은 시간 가는 줄 모르니까요

아픈 마음은 시간이 흐르는 탓이니

우리는 행복을 노래합시다


시린 가슴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붉은 초침이 멈추는 날 나에게 물어주세요


내가 좋아한 계절

사랑한 이의 이름 같은 것들을

종이 가득 적어줄게요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2002년 월드컵 준결승전 길거리 응원이다.

아빠 목마 타고 주위의 후끈한 분위기에 덩달아 신이 나 마구 소리 질렀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하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건 습한 날씨 속 빨간색 옷을 입었다는 것과 두건 역시 빨간 것을 썼다는 것이다. 아마 볼에는 태극기 모양 페인팅도 그렸을 것이다. 내 나이 일곱 살이던 18년 전의 6월. 과거가 오늘인 날은 분명히 존재했는데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이미 시간은 흘러있었다. 모호한 문장이지만 어제 먹은 점심도 가물가물한데 먼 기억을 논하는 문장이 명료할 리 없다. 그래서 추상적인 것을 글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존경스럽다.


내가 어렸던 시간을 어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흥미롭기 그지없다.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는 날에 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퍼붓는 질문 세례는 온전히 할머니 몫이 된다. 한 동네에서 만나 결혼하여 '한동댁'이 별명이었던 친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서울로 올라오셔서 과일가게, 분식집을 하며 생계를 이어오셨다. 과일가게 앞에서 찍은 두 분의 누런빛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먹먹한 무언가가 올라온다. 과거가 가진 힘 이리라. 부모님의 결혼식 비디오는 또 어떤가. 사진에서 멈춰있던 젊은 엄마 아빠의 미소는 마치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이 화면에서 생동한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까지 기억하는 그들은 나를 완성하는 참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할아버지의 금시계를 만지작거리던 날을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글씨 쓰기를 좋아하셔서 종이 위에 반듯한 글체로 책을 필사하곤 하셨다. 사각거리며 종이를 가르는 연필은 뾰족할 때와 뭉툭할 때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칼로 깎아 유난히 기다란 심은 죽은 종이에 긴 호흡을 불어넣는다. 건넛방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까지 곁들이며 8살의 나는 할아버지 시계를 손에 꼭 쥔 채로 한여름의 낮잠을 즐겼다. 가장 정적이며 행복한 기억이다.


과거가 그리울수록 현실이 불행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지금껏 갈등을 마주할 때 맞서 싸우기보다 도망치기를 선호했기 때문에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현재가 나를 괴롭힌다면 적당히 장식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방어기제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요즘 더 많이 의문한다. 삶이 많이 팍팍해졌다고 하는데 정말 이 모든 것이 내가 부족한 탓이 아니라, 경쟁사회의 추악함 때문일까? 노력하지 않을 게으른 핑곗거리 하나 더 만드는 것은 아닐지. 요즘은 하루도 마음이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 엄마 아빠도 그런 시기가 있었는지 묻고 싶지만 답은 이미 수차례 들어 익히 알고 있다. 나는 그냥 옛날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인 것 같았다. 아빠는 아니더라도 엄마는 그랬다. 어린 시절 사진을 봐도 다른 사람의 사진으로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엄마가 아빠를 만나 결혼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군대 가기 전에야 들었다. 중국어 학원에서 강사와 학생으로 만난 둘은 아빠의 대시로 연애를 시작했다. 엄마에게 그 남자는 6살이나 많은 아저씨였지만 만나보니 묘한 끌림이 있었다더라.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어처럼 인생의 반쪽을 찾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는 말은 아빠가 좋아하는 시의 구절이다. 잘 이뤄나가는 중인지 궁금하지만 일부러 묻고 답하는 수고로움을 덜어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로 한다. 설거지나 대화, 안마 같은 것들 말이다. 살가운 아들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노력하는 중이에요.


나는 웃을 때 한쪽 입술만 낚싯줄에 걸린 것처럼 어색하게 씩 올라간다. 서재 벽에 걸린 액자 속 젊은 아빠가 똑같이 웃고 있다. 내가 아빠 아들이긴 하구나, 안도하는 나를 심심히 쳐다보다가


웃는다.

내가 많이 닮은 늙은 아버지가.

작가의 이전글 만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