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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하 Dec 21. 2020

혼자서 걸었습니다

프롤로그: 8월의 제주

모든 것이 정체된 요즘 그 길이 더욱 그립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에서 '아, 정말 오기를 잘했다' 느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를 새로운 환경에 데려다 놓았던 경험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비슷하겠거니 믿었습니다.

10월, 볕 좋은 가을 하늘은 내 마음이 감히 상상하는 어떤 색보다도 다채로웠는데, 그 빛을 받고 자란 나무들에 대해 어떤 수식이 필요할까요? 돌담은 무채색으로 칙칙하여도 그 옆을 뛰노는 초등학생들의 웃음소리와 너그럽게 어울렸습니다.


사실 나는 올레길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한 여름 태양이 작열하던 한 낮을 객기로 무장한 20대 청년 둘이서 낄낄대며 걸었던 8월. 동쪽의 성산은 가을에 제주를 다시 찾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현기증을 미지근한 물로 달래 가며 모래밭을 걸었습니다. 푹푹 들어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한데 설상가상으로 신발까지 고장이 나버렸지요. 밑창이 뜯어져서 모래가 솔솔 들어오는데 그때부터 마음을 놓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시간에 대한 강박을 내려두고 노래를 흥얼대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푹푹 찌는 흙모래밭

반쯤 나간 정신을 붙들고 겨우 도착한 식당에서 주문도 전에 내어진 냉수를 마구 들이켜는 우리를 보며, 주인아주머니께서 한 말씀하십니다.


"워메 예쁜 얼굴 다 꺼슬렸구마"


그래서 제 얼굴은 정말로 예쁜 얼굴일까요? 젊다는 것은 어떤 뜻일지 시간을 지나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밑반찬으로 나온 정말 맛있는 묵은지를 비우고 나서 조금만 더 주실 수 있는지 여쭈니 '맛있지?'라며 활짝 웃으십니다. 나도 나이가 더 들면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웃어줄 수 있을까요? 좋은 핑곗거리 하나 없어지는 것 아닐지 걱정입니다.


올레길은 코스마다 중간 스탬프가 하나씩 놓여있습니다. 끝만 보고 걷기에는 제법 거리가 길어서 절반 즈음에 이 스탬프를 만나면 힘이 생기고는 하지요. 가끔 차를 가지고 와서 도장만 찍고 가시는 분들도 눈에 띄곤 합니다.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을 놓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안타까움을 가지면서도,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텐데 함부로 넘겨짚는 오만에 대해 반성합니다. 나의 파란색 올레 패스포트에 도장을 남기면 그뿐이니까요.

나의 올레 패스포트

더워도 너무 더웠던 8월의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광치기 올레' 그리고' 표선 올레'는 감사하게도 작은 카페나 슈퍼를 중간 지점으로 경유하는 코스입니다. 어지러운 뒷목을 부여잡고 들이키던 이온음료의 맛은 더없이 훌륭했지요. 빨간색 파라솔 아래서 하염없이 바라보던 바다는 정말 코발트블루색이었습니다. 몇 모금에 사라져 버린 음료수 병에 정수기 물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우리는 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렇게 따가운 햇살은 처음이었거든요.

3-A코스 중간 스탬프 지점 "신산리 마을 카페"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말처럼, 우리는 느리게 많이 걸었습니다. 한 명은 작은 캠코더를, 다른 한 명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각자의 여름을 기록하면서 말이죠. 이틀 차가 끝나가던 오후, 계획했던 3일을 다 채우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발 밑창은 너덜대고 다리도 쑤시는데 때마침 다른 친구 한 명이 더 놀러 오기로 했거든요. 계획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할 때, 필요 이상의 억지를 부리지 않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새로운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까요.


그렇게 이틀간의 두 남자 올레 탐방은 시흥에서 표선까지 약 55km의 짧은 여정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모든 여행에는 아쉬움이 따르지만, 그 여름 올레길에 나는 훨씬 더 많은 미련을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나도 모르던 나의 결핍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걷기와 사색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머지않아 나는 다시 올레길을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시원한 가을 날씨, 노을이 예쁜 서쪽의 바다, 그리고 나 혼자라는 점이 달랐습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혼자 떠나는 여행을 어머니도, 아버지도, 은근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기에, 허전한 마음 가득 채우고 돌아오리라는 포부를 밝히며 고민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환상적인 가을 올레가 시작되고 있었지요. 맹세컨대 나도, 내가 걷기 같은 따분한 일에 심취하게 될 줄은 절대 몰랐어요. 어쩌겠습니까. 무언갈 새롭게 좋아하게 되는 것은 더없이 즐거운 일인걸요!


나는 굳이 혼자서 걷기를 택하였고, 그 결심대로 가을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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